전 세계에서 매달 5,000만 개의 디지털 지갑이 스테이블코인을 주고받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같은 실물 화폐에 가치를 고정한 디지털 화폐다. 쉽게 말해 '디지털 달러'다. 은행을 거치지 않고, 24시간 365일, 국경 없이 돈을 보낼 수 있다. 수수료는 은행 송금의 수십분의 1 수준이다.
4년 전만 해도 500만 개에 불과했던 스테이블코인 이용 지갑이 10배로 늘었다. 블록체인 분석 기업 아르테미스(Artemis)의 데이터다. 단일 네트워크에 몰려 있던 거래는 이제 이더리움, 솔라나, BNB체인, 트론 등 여러 블록체인으로 퍼져나갔다. 특정 플랫폼이 아니라, 돈이 가장 빠르고 싸게 도착하는 곳이면 어디든 쓰인다.
"2035년이면 비자카드만큼 쓴다"
이 흐름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블록체인 분석 기업 체이널리시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놀라운 전망을 내놨다. 현재 연간 약 28조 달러(약 3경 8,000조원)인 스테이블코인 거래량이 2035년에는 719조 달러(약 97경원)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세대 간 부의 이전과 오프라인 결제 확산까지 더하면 1,500조 달러(약 203경원)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체이널리시스는 2031~2039년 사이에 스테이블코인 결제 규모가 비자·마스터카드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봤다. 이미 글로벌 송금 기업 웨스턴유니온이 솔라나 블록체인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도입했고, 피델리티를 비롯한 주요 글로벌 금융기업들이 스테이블코인 인프라 구축에 나섰다. 스트라이프는 스테이블코인 인프라 기업 브릿지(Bridge)를 11억 달러에 인수했다. 더 이상 '크립토 전용 도구'가 아니라, 글로벌 금융의 새로운 결제·정산 인프라가 되고 있다.
문제는 이 거대한 전환 속에서 원화의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해외에서 먼저 만들어진 원화 스테이블코인
지난해 10월, 블록체인 기업 IQ와 스테이블코인 프로토콜 Frax가 케이맨(Cayman) 제도에서 세계 최초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KRWQ'를 발행했다.
원화와 1대1로 가치가 연동되는 디지털 토큰이다. 월가가 지원하는 크립토 거래소 EDXM에 상장돼 화제가 됐다.
지난달에는 글로벌 크립토 결제 기업 문페이(MoonPay)가 우리은행과 손잡고 원화 스테이블코인 컨소시엄을 만들었다. KRWQ는 해외 기관 투자자를 위한 외환 트레이딩, 문페이는 은행과 함께하는 글로벌 결제·송금을 노린다. 방향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둘 다 한국 정부의 인가를 받고 탄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 제도 안에서 만들어진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아직 단 하나도 없다.
KRWQ, 기대와 현실의 괴리
KRWQ는 블룸버그 보도를 타며 글로벌 금융권의 주목을 받았지만, 실제 성적표는 기대에 못 미친다.
한국은행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KRWQ의 하루 거래량은 약 21만 달러(약 3억 1,000만원)에 불과하다. 하루 약 270억 달러가 오가는 원화 NDF(차액결제선물환) 시장의 0.0003%에 해당하는 규모다. EDXM 측이 "1년 안에 하루 5억 달러 거래를 목표로 한다"고 밝힌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KRWQ 측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주요 마켓메이커(시장조성자)가 온보딩 중"이라고 했지만, 이후 "아직 완전히 온보딩되지 않아 가격 게시도 안 되고, 실거래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확인했다. 거래소 자체가 비공개 기관 전용 플랫폼이라 거래량 공개 여부도 불투명하다.
가격 안정성도 문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1원 = 1 KRWQ로 가치가 유지돼야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한은 자료에 따르면, 같은 기간 실제 원·달러 환율이 1,455~1,500원 범위에서 움직인 반면 KRWQ 가격은 1,465~1,536원까지 크게 흔들렸다. 가치 고정(페깅)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한국은행은 "원화 NDF 시장의 온체인화가 당장 가시화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외환당국 관계자도 "NDF 거래는 비용만의 문제가 아니라, 만기 시 어떤 기준환율로 정산하느냐가 핵심"이라며 "정산 기준이 시장에서 신뢰를 얻지 못하면 실수요가 붙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국내 블록체인 업계도 냉정하다. 한 국내 블록체인 기업 관계자는 본지에 "KRWQ는 한국에 아무 혜택이 없다"고 말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발행도, 거래도, 준비금 관리도 모두 한국 규제 밖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투명성'을 내세웠지만,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KRWQ는 출범 때부터 투명성을 강조했다. 홈페이지에 실시간 준비금 현황을 공개하고, 신한증권이 한국 국채를 수탁하는 구조와 122.8%의 준비금 비율을 보여줬다. "우리는 투명하다"는 메시지를 앞세운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에 대한 태도는 달랐다. 본지는 KRWQ 팀을 인터뷰한 뒤, EDXM 출시 이후 상황에 대해 서면 질문을 보냈다. 여러차례 답변을 요청했고, 기사 발행 시점까지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
블록체인 위의 숫자는 투명하게 공개하면서, 언론의 기본적인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기관 투자자를 겨냥한다면서 기본적인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투명성'이라는 약속의 진정성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세계는 달리는데, 한국은 논쟁 중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사이, 한국의 입법은 제자리다.
미국은 지난해 7월 스테이블코인 전용 법률인 GENIUS Act를 제정했다. EU는 가상자산시장규제법(MiCA)에 따라 다수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를 인가했다. 한국에서도 안도걸·김은혜 의원이 한국판 '지니어스법'을 발의했고, 금융위원회가 가상자산 2단계 법안을 준비 중이다. 그러나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누가 발행해야 하느냐'를 둘러싼 이른바 '51%룰' 논쟁으로 1년 넘게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은행이 51% 이상 지분을 가진 컨소시엄만 발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핀테크 업계는 이를 민간 진입 차단으로 보고 반발한다.
이창용 전 한국은행 총재는 "비은행까지 발행을 허용하면 금융 구조에 예상치 못한 변화가 생길 수 있다"며 신중론을 폈다. 신현송 신임 한은 총재는 "NDF 거래가 많아져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현상이 나타났다"며 "모니터링이 어려운 NDF 시장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했다. 방향은 맞지만, 속도가 문제다.
한은 국제국은 더 직접적인 우려를 내놨다. "해외에서 발행된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규모가 커지면 원화가 해외에서 자유롭게 거래되는 효과가 생기며, 우리 당국이 직접 규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수요는 있는데 답은 없다
체이널리시스에 따르면 한국인은 이미 연간 약 640억 달러(약 87조원) 규모의 스테이블코인을 거래하고 있다. 다만 거의 전부가 달러 스테이블코인이다. 한국인이 디지털 화폐를 쓰고 있는데, 정작 원화 디지털 화폐는 없는 셈이다.
KRWQ가 그 답이 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증명되지 않았다. 거래량은 사실상 없고, 가격 안정성도 부족하며, 마켓메이커 온보딩도 끝나지 않았다. 미디어의 기본적인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 문페이는 아직 첫발을 뗀 단계다.
스테이블코인은 글로벌 금융의 새로운 인프라가 되고 있다. 비자카드가 플라스틱 카드로 현금을 대체했듯, 스테이블코인이 은행 송금을 대체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원화가 이 새로운 인프라 위에 올라타지 못하면, 한국인의 디지털 금융 활동은 계속 달러에 의존하게 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수요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 수요를 한국 안에서 채울 것인가, 해외에 내줄 것인가. 한국이 자체 해법을 내놓지 않으면, 선택지조차 없어진다.
본지는 KRWQ 측에 EDXM 출시 이후 거래 현황 등에 대해 수차례 서면 질의했으나, 기사 발행 시점까지 답변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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