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최대 은행 DBS가 미국에서 진행 중인 디지털자산 시장 명확성 법안(CLARITY Act, Digital Asset Market Clarity Act)의 진척을 두고 "시장이 여전히 과소평가하고 있는 구조적 전환점"이라고 진단했다. 스테이블코인이 단순 거래 수단에서 '생산적 금융 인프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DBS의 장웨이량(Chang Wei Liang) FX·크레딧 전략가와 치정펑(Chee Zheng Feng) 애널리스트가 공동 작성한 5월 14일자 'Crypto Digest'에 따르면, CLARITY 법안은 은행 시스템의 안정성과 디지털자산 혁신 사이의 균형을 잡은 "건설적 타협"으로 평가된다.
■ 상원 은행위 15대 9로 통과… 본회의行 확정
DBS 리포트가 발간된 같은 날, 미국 상원 은행위원회는 CLARITY 법안을 15대 9 표결로 통과시키며 본회의에 상정했다. 공화당 의원 13명 전원에 민주당 루벤 가예고(애리조나)·앤절라 올소브룩스(메릴랜드) 의원이 합류한 결과다. 법안은 2025년 7월 하원에서 294대 134로 가결된 후 10개월 만에 상원 첫 관문을 넘었다.
핵심 쟁점이었던 스테이블코인 수익(yield) 조항은 톰 틸리스(공화·노스캐롤라이나)와 앤절라 올소브룩스(민주·메릴랜드) 상원의원이 4개월 이상 협상해 만든 절충안이 그대로 살아남았다. 미국은행협회(ABA) 등 은행 로비단체가 상원에 8,000통 이상의 반대 서한을 보냈음에도 협상안은 유지됐다.
■ "예금 유사 이자는 금지, 사용 기반 보상은 허용"… 묘수의 핵심
CLARITY 법안의 스테이블코인 조항은 명확한 선을 그었다. 단순히 스테이블코인을 보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지급되는 이자성 수익은 금지하되, 거래·결제·스테이킹 등 실질적 활동에 따른 인센티브는 허용한다. 코인베이스의 폴 그루얼 최고법무책임자는 "사용자가 크립토 플랫폼에서 실제 참여한 활동에 대한 보상 구조는 보존됐다"고 평가했다.
DBS는 이 절충안이 은행 예금 이탈에 대한 우려를 완화하면서도 크립토 기업에게는 거래·결제·스테이킹 등 사용자 유인 공간을 열어준다고 분석했다. 미국 은행권이 대출 자금의 약 80%를 고객 예금으로 조달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패시브 수익 금지는 은행권의 자금조달 기반을 보호하는 장치다. 동시에 "구매 후 보유(buy-and-hold)"에서 "구매 후 사용(buy-and-use)"으로의 구조 전환을 유도해, 스테이블코인이 결제망에 더 깊숙이 통합되는 길을 연다.
특히 DBS는 장기적으로 이 구조가 "스테이블코인을 현금 등가물이 아닌 생산적 활용처를 가진 자산으로 변모시킬 것"으로 전망했다. 발행, 수탁(custody), 결제·정산 인프라 전반에서 핀테크와 전통 금융기관 모두에게 새로운 수익 기회가 열린다는 의미다.
■ 테더·USDC가 시장의 83% 장악… 과점 구도 고착화
DBS가 디파이라마(DeFiLlama) 데이터를 인용해 제시한 스테이블코인 시장 점유율은 명확한 과점 구도를 보여준다. 테더(USDT)가 59%, USDC가 24%로 합산 83%를 점유하고 있다. 스카이 달러(Sky Dollar)가 3%, 기타 발행사가 14%를 나눠 갖는다.
미국 입법 절차가 진행될수록 이 구조는 더욱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다. 명확한 법적 프레임 하에서는 규제 준수 능력과 자본력을 갖춘 기존 사업자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다만 서클(Circle)의 단테 디스파르테 CSO는 이번 절충안에 대해 "타협안은 의미 있는 진전이며, 미국이 디지털자산 분야에서 '주도할 것인가 끌려갈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주도를 택했다는 신호"라고 평가했다.
■ 비트코인·이더리움 동반 반등… ETF·기업 자금 유입 계속
DBS 리포트는 디지털자산 가격 동향도 함께 짚었다. 3월 말 이후 4월~5월 초 기간 동안 비트코인은 18%, 이더리움은 8%의 상승률을 기록하며 S&P 500과 나스닥(각각 10~15% 상승)에 필적하는 성과를 냈다. 같은 기간 금은 사실상 보합세였다.
자금 유입도 견조하다. 비트코인 현물 ETF로 약 20억 달러가 순유입됐고, 디지털자산 트레저리 기업(DATCO) 가운데 마이크로스트래티지(현 Strategy)가 추가로 약 40억 달러어치를 매수했다. 이더리움 ETF로는 3억5,600만 달러, 비트마인이 약 7억6,000만 달러를 매수해 합산 약 10억 달러 규모의 매수세가 형성됐다. 이는 3월 말 기준 이더리움 시가총액의 약 0.4%에 해당하며, 비트코인의 60억 달러 매수세가 시총의 0.45%를 차지한 것과 유사한 수준이다.
5월 12일 기준 비트코인 가격은 8만526달러, 이더리움은 2,278달러를 기록했다. 비트코인의 5년 누적 수익률은 115.8%, 같은 기간 금은 147.3%, S&P 500은 76%였다.
■ 신호의 본질: 규제 진전이 아닌 '금융 통합'
이번 진전의 본질은 단순한 규제 진척이 아니라 금융 시스템 통합에 있다. 은행권이 더 이상 스테이블코인을 '외부의 크립토 실험'이 아닌 '미래 통화 스택(monetary stack)의 일부'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이는 토큰화(tokenization) 산업에도 근본적 함의를 갖는다. 프로그래머블 자산(programmable assets)은 프로그래머블 유동성을 필요로 한다. 스테이블코인은 빠르게 전통 금융과 온체인 자본시장을 잇는 결제·정산 레이어로 자리잡고 있다. RWA(실물자산 토큰화) 시장이 본격 확장되려면 그 결제 인프라가 먼저 깔려야 하며, CLARITY 법안의 절충안은 바로 그 인프라의 법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 한국 시장 시사점: 원화 스테이블코인 입법 논의에 직접 영향
미국의 이번 선례는 현재 한국에서 진행 중인 원화 스테이블코인 입법 논의에 직접적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수익은 금지하되 사용 인센티브는 허용"하는 이중 트랙 설계는 한국 입법 논의에서도 유력한 절충 모델이 될 수 있다. 시중은행의 요구불예금 이탈 우려와 핀테크·디지털자산 사업자의 사용자 유인 필요성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구조다. 한국은행과 금융위원회가 양 진영의 우려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Tillis-Alsobrooks 절충안'은 중요한 참조점이 될 전망이다.
둘째, 카카오뱅크·토스뱅크 등 인터넷전문은행과 핀테크 사업자에게는 수탁·결제·발행 영역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가 열린다. 미국 사례에서 보듯, 명확한 법적 프레임이 정착되면 자본력과 컴플라이언스 역량을 갖춘 사업자가 우위를 점한다.
셋째, KRWQ 등 원화 페그 스테이블코인 프로젝트에는 양면적 신호다. 미국식 입법은 발행과 사용 활동을 명확히 구분해 합법화하지만, 동시에 패시브 수익 금지는 사업 모델 설계에 제약을 부과한다. 한국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역외 KRW NDF 시장 등 기관 결제 회랑을 겨냥할 경우, 미국식 '사용 기반 인센티브' 프레임은 오히려 사업 구조와 잘 맞을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테더·USDC의 83% 과점 구도는 한국 사업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글로벌 달러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이미 진입장벽이 매우 높아진 만큼, 한국 사업자는 원화 페그 및 아시아 무역결제 회랑이라는 차별화 영역에서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는 의미다.
CLARITY 법안은 본회의 통과를 위해 필리버스터 저지선인 60표가 필요하다. 공화당 의원 53명 전원 찬성을 가정해도 민주당에서 7표가 필요한 상황이다. 최종 법제화는 빨라야 2027년 시행으로 전망되지만, 상원 위원회 통과 그 자체가 글로벌 디지털자산 시장의 게임 룰을 재편하는 출발 신호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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