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체인분석] 토큰화 증권 시대, 거래소의 경쟁자는 거래소가 아닐 수 있다

| 알파리포트

토큰화 증권 시장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주로 무엇을 토큰화할 것인지에 집중한다. 주식, 채권, 부동산, 펀드, 미술품, 탄소배출권. 자산의 종류를 나열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그렇게 토큰화된 자산은 어디서, 어떻게 거래될 것인가.

이번에 공개된 AMM 주식시장 적용 연구는 이 질문을 정면으로 건드린다. 연구진은 암호화폐 시장의 자동화 시장조성자 구조를 미국 주식시장에 적용하면 기존 시장 대비 거래비용을 38~55% 낮출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단순한 기술 실험이 아니다. 이는 토큰화 증권 시대의 거래소 경쟁이 상장 자산 확보보다 유동성 설계에서 갈릴 수 있다는 신호다.

지금까지 거래소의 힘은 상장과 주문장에 있었다. 좋은 기업이 상장하고, 투자자가 몰리고, 주문이 쌓이면 거래소는 유동성을 확보했다. 그러나 토큰화 시대에는 이 공식이 흔들릴 수 있다. 자산은 여러 플랫폼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고, 결제와 보관 인프라는 분산될 수 있으며, 투자자는 24시간 글로벌 시장에 접속한다. 이때 핵심 경쟁력은 “어디에 상장했는가”보다 “어디서 가장 싸고 안정적으로 거래되는가”가 된다.

AMM은 이 지점에서 강력한 문제 제기를 한다. 기존 거래소는 전문 시장조성자, 브로커, 고빈도거래업자, 청산·결제기관이 촘촘히 얽힌 구조다. 유동성은 많지만, 구조는 무겁다. 반면 AMM은 유동성 풀이라는 단순한 장치를 통해 거래를 자동화한다. 유동성 공급자는 시장을 계속 감시하지 않아도 되고, 거래자는 풀을 상대로 즉시 거래할 수 있다.

물론 암호화폐 시장의 AMM을 그대로 주식시장에 옮길 수는 없다. 주식은 배당과 의결권이 있고, 공시와 내부자거래 규제가 있으며, 예탁결제와 청산 규칙이 있다. AMM 풀에 예치된 주식의 법적 소유권을 어떻게 볼 것인지도 복잡하다. 여기에 세금 문제가 얹히면 난도는 더 올라간다. AMM 풀 안에서 발생하는 잦은 거래가 유동성 공급자에게 과세 이벤트로 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방향성은 분명하다. 토큰화 증권 시장은 기존 주식시장을 단순히 블록체인 위에 복사하는 방식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토큰화의 진짜 의미는 자산의 디지털화가 아니라 시장 기능의 재설계다. 발행, 유통, 결제, 담보, 대출, 유동성 공급이 하나의 프로그래머블 인프라 위에서 연결될 때 비로소 토큰화의 경제적 효과가 나타난다.

이번 논문은 특히 미국 증권시장 변화와 맞물려 있다. 연구진은 SEC의 ‘프로젝트 크립토’, 주요 거래소의 토큰화 거래 검토, 예탁결제기관의 토큰화 서비스 허용 흐름을 언급하며 AMM 연구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이는 미국 자본시장이 토큰화 증권을 단순한 신상품이 아니라 시장구조 이슈로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한국도 비슷한 갈림길에 있다. 토큰증권 제도화, 조각투자, 실물자산 토큰화,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논의가 규제 문구와 사업자 인가에만 갇히면 시장은 작게 열린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거래 인프라를 만들 것인지다. 기존 증권사의 장외거래 시스템을 조금 고치는 수준으로는 글로벌 토큰화 경쟁에서 이기기 어렵다.

한국 자본시장의 약점은 명확하다. 비상장 자산은 유동성이 얕고, 중소형주는 거래비용이 높고, 개인 투자자는 좋은 유동성 공급자가 되기 어렵다. 반대로 AMM은 장기 보유자의 자산을 유동성으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예컨대 장기 보유 기관이나 대주주, 펀드, 개인 투자자가 일정 조건 아래 토큰화 주식 풀에 유동성을 제공하고 수수료를 받을 수 있다면, 시장조성의 문턱은 낮아진다.

연구진은 AMM 유동성 공급에 필요한 예치 규모도 과도하지 않다고 분석했다. 미국 주식 데이터를 기준으로 손익분기 유동성 예치는 평균적으로 발행주식의 약 1% 수준이었다. 또 단일 종목 가격제한장치나 서킷브레이커를 적용하면 필요한 현금 예치 부담은 더 줄어들 수 있다고 봤다. 이는 AMM이 이론상 막대한 자본을 요구하는 구조는 아니라는 의미다.

다만 정책적으로는 신중해야 한다. AMM을 무턱대고 주식시장에 넣으면 새로운 리스크가 생긴다. 시장 급변 시 가격 형성은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 기존 거래소와 가격 차이가 날 때 차익거래는 어떻게 작동할 것인지, 개인 유동성 공급자가 손실 구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지 따져야 한다. 금융에서 “자동화”는 종종 책임 소재를 흐리게 만든다. 코드가 거래한다고 해서 책임까지 코드가 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AMM 논의는 기술 도입론이 아니라 제도 설계론이어야 한다. 누가 풀을 운영할 것인가. 누가 자산을 보관할 것인가. 수수료는 자산별로 어떻게 정할 것인가. 투자자 보호 장치는 어떻게 붙일 것인가. 기존 거래소의 최선집행 의무와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AMM은 실험실 밖으로 나오기 어렵다.

그러나 반대로 이 질문에 답하는 시장은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 토큰화 증권 시장에서 승자는 가장 많은 자산을 먼저 토큰화한 곳이 아닐 수 있다. 가장 낮은 비용으로, 가장 안정적인 유동성을 제공하는 곳일 가능성이 크다.

디지털 자산 시장은 그동안 전통 금융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사기, 해킹, 투기, 과잉 레버리지. 그러나 동시에 전통 금융이 시도하지 못한 시장 설계 실험도 축적했다. AMM은 그중 가장 중요한 실험 중 하나다.

토큰화 시대의 거래소 경쟁은 이제 시작이다. 다음 거래소의 경쟁자는 또 다른 거래소가 아닐 수 있다. 더 낮은 비용으로 유동성을 자동 공급하는 코드일 수 있다. 금융시장은 늘 그렇게 바뀌었다. 가장 조용한 배관이, 어느 날 가장 강한 권력이 된다.

본 기사는 시장 데이터 및 차트 분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에 대한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많이 본 기사

지금 꼭 알아야 할 리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