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가 지난 10여 년간 소프트웨어와 앱에 집중하는 동안, 플레이그라운드 글로벌은 반도체와 양자컴퓨팅, 로보틱스, 에너지 인프라 같은 ‘피지컬 테크’에 베팅해 왔다. 최근 인공지능(AI) 확산으로 칩과 전력, 데이터센터 수요가 급증하자 시장이 뒤늦게 이 분야의 중요성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크런치베이스 뉴스에 따르면 플레이그라운드 글로벌 공동창업자 피터 배럿은 최근 인터뷰에서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집어삼키는 동안 실리콘밸리는 ‘실리콘’을 잊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AI가 소프트웨어를 넘어 실제 산업 구조를 바꾸는 국면에 접어들면서, 반도체와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자본 투입이 다시 확대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플레이그라운드 글로벌은 최근 딥테크 스타트업의 시드와 시리즈A 투자에 초점을 맞춘 4억7500만달러 규모 펀드를 조성했다. 원화 기준으로는 약 7161억원 수준이다. 회사는 2015년 설립 이후 과학과 공학의 돌파구가 차세대 대형 기업을 만든다는 투자 논리를 일관되게 밀어왔다.
배럿은 지금의 AI 붐이 단순한 모델 경쟁에 그치지 않는다고 본다. 연산 능력과 반도체, 전력망, 데이터센터 설비까지 모두 병목이 되고 있어 결국 ‘물리적 계층’에 대한 투자가 필수라는 주장이다. 그는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이 영역에서 투자해 왔다”며 “이제 업계 전체가 같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플레이그라운드 글로벌의 포트폴리오는 이 같은 색채를 분명히 보여준다. 양자컴퓨팅 기업 사이퀀텀(PsiQuantum), 초전도 로직 기업 스노우캡, 반도체 제조용 고출력 레이저를 개발하는 xLight, 바이오 기업 매니폴드 바이오 등이 대표적이다. 배럿은 특히 일부 기술이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해당 분야의 물리와 공학을 이해하면 실제로는 상용화 가능성이 높은 경우가 많다고 강조했다.
그는 AI 시대 최대 과제로 ‘효율’을 꼽았다. 현재 대규모언어모델(LLM)은 발전 속도가 빠르지만 에너지 소비가 지나치게 크고, 하드웨어 구조도 여전히 초기 단계라는 판단이다. 배럿은 현 상황을 ‘AI의 도스(DOS) 시대’라고 표현하며, 앞으로 모델 구조와 반도체 아키텍처, 메모리, 광통신, 전력 전달 방식까지 전면적 혁신이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반도체와 전력 분야에서는 낙관론이 강했다. 그는 스노우캡의 초전도 로직 기술이 기존 트랜지스터보다 에너지 효율을 수백~수천 배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알바 에너지를 예로 들며, 새로운 원자로를 짓는 대신 기존 원전 설비를 현대화해 훨씬 빠르게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AI 인프라 확대가 전력 부족에 부딪히는 만큼, 이런 해법이 더 현실적이라는 시각이다.
반면 ‘우주 데이터센터’ 같은 구상에는 강하게 선을 그었다. 배럿은 우주 공간이 냉각과 경제성 측면에서 데이터센터에 적합하지 않다며, 지상에서도 충분한 재생에너지와 대규모 발전 설비를 구축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술적으로 가능해 보여도 사업성과 시간표가 맞지 않으면 투자 대상으로 보기 어렵다는 의미다.
그는 또 딥테크가 벤처투자와 맞지 않는다는 통념에도 반박했다. 양자컴퓨팅처럼 10년 이상이 걸리는 프로젝트도 있지만, 일부 하드웨어와 바이오 기업은 수년 안에 매출을 내거나 대형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매니폴드 바이는 지난해 로슈와 최대 20억달러 규모 계약을 맺었다고 소개했다. 원화로는 약 3조150억원 수준이다.
배럿은 앞으로 서구권의 ‘기술 주권’ 강화 움직임도 중요한 투자 축이 될 것으로 봤다. 유럽과 호주, 캐나다 등에서 자국 내 기술 역량과 산업 기반을 키우려는 수요가 커지고 있으며, 막대한 연기금과 기관 자본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과학과 자본을 더 효율적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이번 인터뷰의 핵심은 분명하다. AI 열풍의 진짜 수혜처는 단순한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그 소프트웨어를 움직이는 반도체와 전력, 연산 인프라, 신소재일 수 있다는 점이다. 시장의 관심이 다시 ‘피지컬 테크’로 이동하는 흐름이 이어진다면, 딥테크 투자는 앞으로 벤처업계의 주변이 아니라 중심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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