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투자 시장이 다수의 초기 프로젝트에 자금을 흩뿌리던 국면을 지나, 소수의 검증된 기업과 인프라로 자본이 집중되는 ‘패러다임 전환’을 맞고 있다. 타이거리서치(Tiger Research)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2018년부터 2026년 상반기까지 9416건의 투자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2026년 상반기 유입 자본은 133억 달러로 2024년 연간 수준에 육박했지만 투자 건수는 435건에 그쳐 2022년 대비 78% 급감했다고 진단했다. 이는 암호화폐 시장에서 자본의 총량보다 ‘어디에 얼마나 집중되느냐’가 더 중요해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번 분석은 타이거리서치와 루트데이터(RootData)가 글로벌 암호화폐 자본 시장의 흐름을 공동 집계한 결과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까지만 해도 시장의 핵심 전략은 속도와 분산이었다. 당시 VC들은 토큰 생성 이벤트(TGE) 일정과 토크노믹스를 중심으로 투자 여부를 빠르게 결정했고, 밸류에이션보다 다수 프로젝트에 소액을 분산하는 이른바 ‘스프레이 앤 프레이’ 전략을 구사했다. 연간 1750건의 투자가 집행됐고, 일부 투자사는 월평균 13건 이상의 딜을 처리할 정도로 과열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베어마켓과 규제 강화 이후 생존한 투자자들의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타이거리서치(Tiger Research)에 따르면 최근 2024년부터 2026년까지 암호화폐 네이티브 대형 VC들은 투자 건수를 줄이는 대신 리드 투자에 자원을 집중하고 있다. 단순 참여보다 실사 수준을 높이고, 이사회 참여와 거버넌스 영향력까지 확보하는 구조로 무게중심을 옮긴 것이다. 반면 일반 라운드 누적 참여 건수 기준으로는 코인베이스 벤처스, OKX 벤처스, YZi 랩스 등 거래소 계열 VC가 상위권을 차지했다. 거래소들은 풍부한 유동성과 마케팅 지원 능력을 앞세워 생태계 내 전략적 투자자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이 과정에서 중소형 VC의 입지는 빠르게 좁아졌다. AU21 캐피털, LD 캐피털, 시마 캐피털 등 과거 상승장에서 공격적으로 포트폴리오를 확장했던 투자사들은 투자 건수가 최대 98.9%까지 감소하며 사실상 영향력을 잃었다. 보고서는 단기 내러티브에 올라탄 분산 투자 전략이 장기 침체 국면에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동시에 시장 전반에 초기 자금이 필요한 신생 프로젝트 자체가 줄어든 점도 구조적 변화의 배경으로 짚었다.
투자 라운드 단계별 변화도 선명하다. 2026년 상반기 시드 딜은 81건으로 2022년 694건 대비 88% 감소했다. 전체 딜 가운데 시드 비중 역시 35.3%에서 18.7%로 축소됐다. 반면 시리즈 A 이상 후기 단계의 투자금액 비중은 75.2%에 달했다. 시리즈 A 총투자액은 7억4500만 달러로, 시드 전체 유입액 4억2300만 달러를 웃돌았다. 평균 딜 사이즈도 시드 540만 달러, 시리즈 A 2240만 달러, 시리즈 C 1억2700만 달러, 시리즈 E 2억200만 달러로 단계가 올라갈수록 가파르게 늘었다. 이는 암호화폐 투자 시장이 ‘씨앗’보다 이미 성장 가능성을 입증한 ‘열매’를 사는 구조로 이동하고 있음을 뜻한다.
시장 전체의 총량과 건수 간 괴리도 뚜렷하다. 2026년 상반기 투자 건수는 435건으로 2022년 연간 1978건의 22% 수준에 불과했지만, 유입 자본은 133억 달러로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대형 딜 비중도 확대됐다. 1억 달러 이상 딜은 상반기에만 32건으로 전체의 7.4%를 차지해 2024년 1.1%에서 크게 뛰었다. 같은 기간 평균 딜 규모는 1170만 달러에서 4740만 달러로 약 4배 증가했다. 적은 수의 프로젝트가 더 큰 자금을 가져가는 ‘집중의 시장’이 형성된 셈이다.
이 같은 변화에는 전통 금융기관의 직접 참여 확대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전통 금융기관이 참여한 투자 딜 비중은 2026년 상반기 54.5%를 기록했다. 2018년 29.2%였던 비중이 2021년 처음 과반을 넘긴 뒤, 최근 다시 고점권을 유지하고 있다. 대표 사례로 캔톤 네트워크(Canton Network) 개발사 디지털 에셋의 3억5500만 달러 라운드에는 BNP파리바, HSBC, S&P 글로벌, 한화투자증권 등 제도권 금융기관이 직접 참여했다. 기관투자자들은 토큰 상장 일정이나 서사보다 감사 가능한 수익 구조, 규제 라이선스, 사업 지속성을 우선 검토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VC 중심 시장과 성격이 다르다.
섹터별 자금 흐름 역시 크게 재편됐다. 2024년 전체 투자 자본의 50.9%를 점유했던 인프라 섹터는 2026년 상반기 14.8%로 급감했다. 대신 결제·스테이블코인 25.3%, 중앙화거래소(CEX) 18.2%, 예측시장 17.5%가 시장을 주도했다. 이는 블록체인 인프라가 독립적 투자 대상이라기보다 기관 비즈니스를 구현하는 기반 기술로 재정의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로빈후드는 아비트럼 기반 자체 레이어를 구동했고, 시큐리타이즈는 상장과 함께 솔라나(SOL)와 아발란체(AVAX)를 결제 레이어로 채택했다. 새 프로토콜을 만드는 시대에서, 기존 인프라 위에 실물 금융 서비스를 얹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반면 게임, NFT, 소셜 섹터는 자본시장에서 급격히 밀려났다. 게임 딜 건수는 141건에서 5건으로 96% 감소했고, NFT는 27건에서 2건, 소셜·엔터테인먼트는 74건에서 11건으로 축소됐다. 투자 금액 역시 모두 크게 줄었다. 보고서는 특히 게임파이 모델이 지속 가능한 게임플레이보다 토큰 보상 설계에 치우치면서, 신규 유저 둔화 시 토큰 가치 하락과 이용자 이탈이 동시에 발생하는 ‘데스 스파이럴’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탈중앙화금융(DeFi)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생존’ 양상을 보였다. 딜 건수는 71% 줄었지만 총투자 금액 감소폭은 34%에 그쳤고, 평균 딜 규모는 450만 달러에서 1040만 달러로 오히려 커졌다. 특히 모듈형 렌딩 프로토콜 모포(Morpho)가 a16z 크립토, 패러다임, 리빗 캐피털 주도로 1억7500만 달러를 유치한 사례는 자본이 검증된 소수 프로토콜에 몰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확장보다 선별, 분산보다 집중이라는 최근 암호화폐 투자 시장의 특징이 DeFi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가장 빠르게 부상한 분야는 결제·스테이블코인이다. 이 섹터의 총투자 금액은 2024년 1억4390만 달러에서 2026년 상반기 28억5050만 달러로 약 20배 증가했다. 다만 상당 부분은 대형 인수합병(M&A)이 견인했다. 마스터카드의 BVNK 인수 18억 달러, 크라켄 모회사 페이워드의 Reap 인수 6억 달러가 상반기 섹터 자금의 약 84%를 차지했다. 여기에 레인과 KAST 등 크로스보더 결제 및 암호화폐 카드 발급 기업도 자금을 유치하며 성장세를 뒷받침했다. 시장은 단순 제휴가 아니라 스테이블코인 인프라를 직접 ‘소유’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평가다.
중앙화거래소(CEX) 섹터 역시 같은 흐름을 보였다. 2024년 3.0%였던 투자 금액 점유율은 2026년 상반기 18.2%로 뛰었지만, 이는 신생 거래소에 대한 벤처 투자 확장이라기보다 대형 사업자 중심의 M&A가 주도한 결과였다. 코인베이스의 데리빗 인수, 크라켄의 닌자트레이더 인수, 네이버의 두나무 지분 인수 추진, MGX의 바이낸스 전략적 투자 등이 이를 대표한다. 거래소는 이제 단순한 플랫폼이 아니라 인수와 지분 투자, 벤처 참여를 동시에 수행하는 복합 자본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새롭게 부상한 예측시장도 기관 자본 집중의 전형으로 꼽힌다.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의 규제 승인을 계기로 칼시와 폴리마켓 같은 선두 업체에 대규모 자금이 유입됐다. 칼시는 패러다임과 코투 주도로 각각 10억 달러 규모 투자를 유치했고, 폴리마켓은 인터콘티넨탈 익스체인지(ICE)로부터 누적 16억 달러 규모 전략 투자를 확보했다. 다수 신생 프로젝트가 경쟁하는 구조가 아니라 규제 우위를 확보한 소수 사업자에 자본이 반복적으로 몰리는 형태다.
수탁(Custody) 섹터도 조용하지만 강한 성장세를 보였다. 2024년 2040만 달러였던 투자 금액은 2026년 상반기 3억1710만 달러로 15배 늘었다. 앵커리지(Anchorage)가 상반기에만 1억 달러 전략 투자를 유치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기관 자산운용사가 암호화폐 시장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규제를 충족하는 수탁 인프라가 필수라는 점에서, 이 분야는 기관 수요 확대의 직접 수혜를 입고 있다.
결국 이번 보고서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암호화폐 투자 시장은 더 이상 단기 내러티브를 좇는 ‘베팅’의 공간이 아니다. 자본은 이제 규제 적합성, 수익 구조, 시장 지배력, 인프라 통제력 같은 요소를 갖춘 소수 기업과 섹터로 몰리고 있다. 타이거리서치(Tiger Research)는 이러한 구조적 변화 속에서 VC의 투자 소식이 더 이상 리테일 추종 매수의 신호로 기능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암호화폐 시장의 자본은 씨앗을 뿌리는 단계에서 벗어나, 성장한 나무와 그 뿌리를 함께 장악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