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학 제품의 완성도는 이용자가 복잡한 보안 기술을 얼마나 많이 인식하느냐보다 필요한 절차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통과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설명이 나왔다. 기술이 제대로 작동할수록 이용자는 그 과정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다는 취지다.
개발자 C.C. Liang은 13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ETHTaipei 2026에서 ‘암호화폐 프로젝트의 이상한 본질’을 주제로 암호학 제품의 설계 방식과 사용성 문제를 설명했다. ETHTaipei 2026 공식 일정에도 해당 세션이 13일 프로그램으로 등록됐다.
ABMedia는 발표 내용을 바탕으로 암호학 제품이 일반 소비자용 소프트웨어와 다른 이유를 정리했다. 핵심은 보안이 제대로 작동할수록 사용자가 그 존재를 체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Liang은 대만의 디지털 인증서 지갑 개발에 참여했던 개발자 Mashbean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인공지능 에이전트에 안드로이드 버전 제작을 요청한 실험을 사례로 들었다. 원래 아이폰용으로 제작된 시제품을 안드로이드 버전으로 바꾼 뒤 편의점에서 실제 사용성을 시험했다는 내용이다.
기존에는 택배를 찾을 때 이름과 신분증 번호 등 개인정보가 담긴 신분증을 점원에게 보여줘야 했다. 디지털 지갑은 통신사가 이용자의 이름과 휴대전화 뒷자리를 증명한 뒤 QR코드로 수령에 필요한 정보만 공개하는 방식이다.
시험 당시 화면에는 디버깅 메시지가 남아 있었지만 점원은 QR코드를 스캔했고 시스템은 택배를 찾아냈다. 이용자 입장에서 보이는 과정은 QR코드 하나를 스캔하는 일뿐이었지만, 그 뒤에서는 영지식증명과 선택적 공개가 작동했다.
Liang은 블록체인 거래에서 네트워크 전환과 가스 토큰 준비, 거래 서명 같은 마찰을 줄이면 이용자 경험이 일반 은행 애플리케이션과 비슷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Liang은 암호학 제품의 특성으로 이용자의 낮은 보안 학습 동기, 높은 추상성, 부족한 즉각적 피드백, 사고 발생 뒤 복구의 어려움, 가장 취약한 부분에 좌우되는 보안 수준을 제시했다. 개발자 Mashbean은 이를 두고 “아무도 아침을 사러 갑옷을 입고 가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하드웨어 지갑의 ‘블라인드 서명’은 대표적인 사례다. 이용자는 이더리움(ETH)을 유에스디코인(USDC)으로 교환하려 하지만 기기에는 계약과 함수 정보가 복잡한 문자열로 표시될 수 있어 거래가 자신의 의도와 일치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Liang은 암호학을 경제학의 ‘신뢰재’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이용자는 자산을 프라이버시 풀에 넣고 수수료를 지불한 뒤에도 자신이 확보한 비연결성이 어느 정도인지, 개인정보 보호가 실제로 작동하는지 전문지식 없이는 확인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암호학 제품은 이용자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경험과 직접 검증하기 어려운 보안·개인정보 보호 기능을 나눠 설계해야 한다. 메시지가 전송됐는지, 자산이 이동했는지는 화면에 보여주되 암호학적 보호 과정은 백그라운드에서 처리하는 방식이다.
보안 기술의 발전도 이용자의 판단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HTTPS가 널리 쓰이면서 이용자는 암호화 과정을 직접 설정하지 않고도 보호된 연결을 이용하게 됐고, 블록체인과 암호학의 결합 역시 프라이버시와 안전성을 높이는 기술 방향으로 논의되고 있다.
다만 서비스 제공자가 검증 대상인 경우에는 녹색 표시 하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Liang은 거래소가 자신의 지급 능력을 입증하는 바이낸스의 준비금 증명을 예로 들며, 이용자가 머클 트리와 검증 방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영지식증명이나 양자내성 서명을 기술 용어 자체로 내세우는 방식에도 신중해야 한다. 전문지식이 없는 이용자에게 개발팀의 보안 감사를 맡기는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암호학 제품의 과제는 기술을 더 많이 보여주는 데 있지 않다. 복잡한 판단을 기계와 산업 표준,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기관에 적절히 맡기고 이용자는 필요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데 있다.
이번 발표는 암호학 기술의 성능만큼 제품 설계와 사용 경험이 실제 채택에 중요하다는 점을 짚었다. 영지식증명과 선택적 공개가 작동하더라도 이용자가 마주하는 화면은 QR코드 하나일 수 있으며, 이 ‘보이지 않음’이 제품 설계의 목표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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