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 제도화를 둘러싸고 한국은행과 금융당국의 입장 차가 이어지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은행 중심 규제가 유일한 답은 아니다”라며 국제적 흐름에 맞춘 유연한 접근을 촉구했다.
5일 서울 코엑스 컨퍼런스룸E6에서 열린 ‘2025 블록체인 진흥주간 X 웹 3.0 컨퍼런스’ 한국블록체인학회 학술대회에서 ‘스테이블코인에 의한 금융산업 진화와 블록체인’을 주제로 한 패널토론이 진행됐다. 이날 이효진 고려대학교 교수가 좌장을 맡았으며 패널에는 서봉욱(DSRV 소장), 김호범(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정규택(인피니소프트 대표), 박용범(단국대학교 교수)이 참여했다.
이효진 고려대학교 교수는 패널토론을 시작하며 “불과 1년 전만 해도 블록체인 부문은 정부 내에서도 변방 취급을 받았지만 새 정부 출범 이후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며 “정부가 스테이블코인과 블록체인을 국민경제 생태계 발전의 핵심 기술로 인식하고 관련 기업과 산업 활성화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위험을 고려한 규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지금은 스테이블코인과 디지털 자산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라고 본다면서 “오늘의 논의가 블록체인 산업 활성화를 위한 실질적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서병윤 DSRV 소장 “첨단 기술은 타이밍이 생명…제도화 너무 늦다”
서병윤 DSRV 소장은 “작년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 시스템을 개발했지만 규제에 부딪혀 투자와 협업이 어려웠다”고 밝혔다.
그는 “올해 새 정부가 스테이블코인을 금융 혁신과 통화 주권 이슈로 인식하면서 상황이 크게 반전된 건 맞다”면서도 “관련 법안도 제출됐지만 한국은행이 우려를 표하면서 부처 간 입장차를 해소하는데 논의가 집중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입법이 내년으로 미뤄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서 실제 제도화 및 산업 시작 시점이 내후년 정도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서 소장은 최근 엔비디아의 GPU 공급 소식이 있었는데 몇 년만 더 일찍 이뤄졌다면 한국이 오픈AI 같은 글로벌 AI 생태계의 한 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첨단 산업은 타이밍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나라가 27년에야 제도를 마련하고 산업을 시작한다면 5~10년은 늦어질 수 있다”면서 기회와 시장 입지를 잃을 수 있는 만큼 위험성보다는 어떻게 잘 할 것인지에 논의의 방향을 둬야 한다고 말했다.
서 소장은 “제도권에서 인정할 수 있는 실용적 필요와 가치를 증명한 게 스테이블코인”이라고 설명했다. 또 스테이블코인을 거래할 때 이더, 트론, 솔라나 같은 코인이 네트워크 수수료로 사용되면서 네트워크 운영을 위한 인센티브라는 실질적 가치가 확인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서 소장은 “현재 스트라이프, 테더, 서클 등 글로벌 결제 기업들이 스테이블코인 시장에 직접 진입하고 있고 월가 금융기관들이 블록체인 기반 국채, 주식 등 실물 자산을 토큰화해 거래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선택적 프라이버시 기술 탑재 등 시장 확대와 함께 다양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면서 “이제 한국도 이러한 변화의 속도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며 “규제 논의에 머무르지 말고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실행력 있는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주요국은 이미 입법 완료…韓 '은행 중심 발행 모델' 놓고 입장차
김효봉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미국, 유럽연합, 일본, 싱가포르, 홍콩 등 글로벌 표준을 만드는 주요 국가들이 이미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제를 마련한 상태지만 우리나라는 통화당국과 금융당국 간 입장 차로 입법 논의가 지연되고 있다고 밝혔다.
주요 인프라인 '은행'의 참여 자체에 대해서는 당국 간 이견이 없지만, 한국은행은 신설 법인의 지분 51% 이상을 은행이 보유하고 코인에 대한 완전한 제어권한을 갖는 '은행 중심의 발행 모델'을 지향하고 있고, 금융당국은 은행이 전체 컨소시엄의 한 구성원으로만 참여해도 충분하다는 모델을 주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한국은행 보고서에서 확인된 스테이블코인 규제 논의 방향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현안과 리스크에 대해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짧게 대안을 다룬 해당 보고서의 결론은 은행이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보고서가 제기한 다양한 리스크가 은행 발행 모델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는 것인지, 리스크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법인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먼저, 은행 중심의 모델이 안정성이나 신뢰 측면에서 효과적이지만 이는 자본금 요건 강화, 인가 요건 강화로도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짚었다.
또 자금세탁방지(AML) 역량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AML 의무는 특정금융정보법에 따라 핀테크를 포함한 모든 금융기관이 동일하게 실시하고 있고, 블록체인과 지갑 관련 AML 문제는 오히려 해당 업계가 더 잘 아는 부분”이라며 은행이 관련 부분에 대해서 더 잘 준비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단기 시장 변동성 문제에 대해서는 “이는 단기 국채에 대해 충분한 물량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며 은행이 통제하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준비금 구성 자산을 단기 안전자산으로 제안하고, 환매 시 유동성을 먼저 활용하고 이후 준비금을 처분하도록 하는 등 준비금 관련 위험을 방어하는 여러 방안들도 논의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 변호사는 “전 세계적으로 어떤 일정한 방향성이 이미 형성되어 있고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서 “이러한 방향성을 우리가 국내적인 의사결정으로 번복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영란은행의 경우 스테이블코인을 ‘현대화’ 작업으로 보고 허용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앞으로 국가 발행, 민간 발행 등 다중 화폐 시스템이 될 것이고, 스테이블코인이 이러한 시스템에서 결제 수단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밝힌 영란은행 부총재 발언을 언급했다.
끝으로 “가상자산과 스테이블코인은 애초부터 바텀업 방식으로 민간의 필요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국내 한정 탑다운 방식이 효과가 있겠나”라며 “국제적 흐름에 맞게 논의 방향을 잡아야 블록체인의 보안, AML 방안, 거시경제 측면에서 모니터링 툴 등 정말 필요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기술은 제도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늦으면 손해만 커질 뿐”
정구태 인피닛블록 대표는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제도적 대립이 있어왔는데 결국 기술을 이기지 못하고 늦어지면 손해가 커질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법률 체계상 명문화된 것만 할 수 있는 구조인데, 디지털 자산 부문은 거의 명문화된 것이 없는 상황이라며 “작년까지도 투자자 보호, 자금세탁방지(AML), 트래블룰 같은 행위 규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 산업 경쟁력을 위한 제도적 기반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했다.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디지털 자산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미국의 ‘지니어스법(Genius Act)’ 등 제도화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정책이 산업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최근 국내 거래소에서 스테이블코인 페깅이 붕괴된 사례는 정책·산업 불균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짚었다. 개인 투자자 중심의 국내 시장의 취약한 구조가 급격한 충격에 대응하지 못하고 산업이 뒷받침하지 못한 결과로, 그 피해는 고스란히 투자자에게 전가됐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정책이 먼저냐 산업이 먼저냐의 문제가 아니라, 양쪽이 속도를 맞춰야 한다”며 “정책이 마련되면 산업은 그 안에서 해법을 찾아낼 것이고, 산업이 커지면 정책은 그 흐름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규제 안정성과 기술 혁신의 균형이 과제
박용범 단국대학교 교수는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블록체인 기술이 디지털 세상에서 실제 세계로 나오는 굉장히 중요한 시기에 와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야후와 라이코스가 구글의 등장으로 사라졌듯, 스테이블코인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새로운 생태계가 우리의 일상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제도와 기술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며 “규제가 금융 시스템을 굉장히 안정적으로 만들어왔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이라고 해서 그 안정성을 깨트려서는 안 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리스크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과 미래로 나아가는 혁신을 잘 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보수적 안정성과 미래 혁신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법과 제도가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기술은 계속 나아가야 한다”며 “정책 당국이 속도를 조절하더라도 산업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열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025 블록체인 진흥주간 X 웹 3.0 컨퍼런스’는 블록체인과 웹3 기술이 결합된 디지털 신뢰사회의 미래상을 조망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하고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이 공동 주관한다.
전통 금융기관, 블록체인 기업, 학계가 함께 참여해 스테이블코인, 인공지능(AI), DID, RWA(실물자산 토큰화) 등 차세대 인프라의 제도권 편입 전략을 논의하며 블록체인 기술이 ‘신뢰 기반 디지털 경제’의 핵심 축으로 자리잡는 구체적인 비전을 공유한다.
<저작권자 ⓒ TokenPos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