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큰화(tokenization)가 ‘월가로 가는 다리’라는 말은 수년째 반복돼 왔다. 미 국채를 온체인에 올리고, 토큰화 머니마켓펀드를 발행하고, 주식을 디지털로 표현하면 기관 자금이 따라 들어올 것이라는 가정이었다. 하지만 토큰화는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에 가깝다. 기관을 진짜로 움직이는 동력은 자산을 디지털로 ‘포장’하는 게 아니라, 수익률(yield)을 금융적으로 ‘가공’하고 거래하는 인프라를 만드는 데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2025년 규제 불확실성이 상당 부분 해소되면서 기관의 디지털자산 접근도 달라졌다. 단순히 ‘노출(exposure)’을 시험해보는 단계에서, 인프라 수준의 참여로 관심이 이동했다. 각종 설문에서도 향후 1~2년 사이 디파이(DeFi·탈중앙화 금융) 참여 의향이 늘고, 실물자산 토큰화(RWA) 역시 탐색하는 투자자가 증가하는 흐름이 관측된다. 다만 대형 자금이 원하는 것은 ‘토큰화된 껍데기’ 보유가 아니다. 기관은 수익률, 자본 효율, 프로그래머블 담보를 원한다. 그리고 이는 2021년 리테일 중심으로 만들어진 1세대 디파이와는 다른 형태의 시장을 요구한다.
전통 금융에서 채권 같은 고정수익 자산은 대개 단독으로 들고만 있지 않는다. 레포(repo)로 자금을 조달하고, 담보로 제공하고, 재담보화(rehypothecation)하며, 분리·헤지해 구조화 상품에 엮는다. 원금과 수익률이 함께 움직이기보다는, 수익률이 원금과 ‘분리’돼 가격이 매겨지고 거래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상품 자체만큼이나 ‘플러밍(plumbing)’, 즉 담보와 결제·리스크 관리가 움직이는 배관 구조가 중요하다. 디파이는 이제 이러한 핵심 기능을 복제하기 시작했다는 평가다.
토큰화된 미 국채나 주식이 단순 ‘증서’처럼 정적인 상태로 머문다면 기관 입장에서 효용은 제한적이다. 기관이 바라는 토큰화 자산은 실제로 작동하는 금융상품이다. 담보로 투입하고(financed), 리스크를 관리하며, 규제·내부통제 한계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운용 전략에 자연스럽게 결합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온체인 자산에서 발생하는 수익률이 ‘분리’돼 가격이 매겨지고 거래되면, 토큰화는 서사(narrative)가 아니라 시장 인프라로 바뀐다. 이 흐름을 시장에서는 1차 토큰화(자산의 디지털화)를 넘어 2차 수익률 시장(수익률의 금융화)으로의 전환으로 본다.
이미 초기 설계 패턴에서도 변화가 읽힌다. ‘허가형(permissioned)’으로 규제 준수 자산을 담보로 쓰되, 차입은 ‘무허가형(permissionless)’ 스테이블코인 유동성을 활용하는 하이브리드 시장 구조가 등장하고 있다. 또 수익률 거래 아키텍처는 원금 노출과 수익 흐름을 분리해, 토큰화 자산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전략의 폭을 넓힌다. 수익률이 온체인에서 독립적으로 가격화되고 조합(composability)될 수 있다면, 기관이 전통 시장에서 이미 운용해온 전략과 훨씬 가까운 형태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수 있다는 얘기다.
기관엔 이 변화가 특히 중요하다. RWA가 단순한 ‘패시브 노출’에서 ‘액티브 도구’로 바뀌기 때문이다. 수익률을 따로 거래할 수 있으면 헤지와 듀레이션 관리가 쉬워지고, 전체 스택을 오프체인에서 다시 쌓지 않아도 구조화 노출을 설계할 여지가 커진다. 토큰화가 ‘가능성’의 이야기에서 ‘작동하는 시장’으로 넘어가는 지점이다.
다만 수익률 인프라만으로 기관 규모의 자금을 끌어오긴 어렵다. 전통 시장을 형성해온 제약은 사라지지 않았고, 디파이에서는 그 제약이 코드로 ‘번역’되는 중이다. 대표적인 제약이 ‘기밀성(confidentiality)’이다. 퍼블릭 블록체인은 잔고, 포지션, 거래 흐름이 그대로 노출된다. 청산 가격대가 보이면 공격적 전략을 유발할 수 있고, 거래 이력이 공개되면 포지셔닝이 드러난다. 재무 운영이 경쟁사에 투명해지는 것도 부담이다. 기관이 중시하는 통제된 공시와 정보 비대칭은 철학적 취향이 아니라 운영 리스크 관리의 문제다.
그간 크립토 업계에서 프라이버시는 규제 리스크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프라이버시가 오히려 컴플라이언스를 가능하게 하는 인프라로 재해석되고 있다. 영지식증명(Zero-Knowledge Proof)은 민감한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도 거래의 유효성을 증명할 수 있다. 선택적 공개(selective disclosure)는 감사인, 규제기관, 과세당국에 필요한 범위만 보여주고 전체 재무 상태를 노출하지 않는 방식을 가능하게 한다. 제재·불법 자금과 연계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면서도 과거 거래 내역 전체를 까지지 않는 설계도 논의된다. 완전동형암호(FHE)처럼 암호화된 데이터 위에서 특정 계산을 수행하는 접근은, 프라이버시를 유지한 채 검증 가능성을 확보하는 금융 행위를 넓힐 수 있는 방향으로 거론된다.
핵심은 이것이 ‘불투명성으로서의 프라이버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프로그래머블한 기밀성으로, 익명 그림자 금융에 가깝기보다 전통 시장의 비공개 브로커리지 워크플로, 규제된 다크풀(dark pool)에 더 근접한 구조다. 기관 입장에선 이 구분이 곧 ‘도입 불가’와 ‘대규모 적용 가능’의 경계가 된다.
두 번째 제약은 컴플라이언스다. 규제 명확성은 불확실성을 줄였지만, 동시에 시장 참여자에게 더 높은 기준을 요구한다. 기관 자금은 자격 통제, 신원 검증, 제재 리스트 스크리닝, 감사 가능성, 명확한 운영 체계를 필요로 한다. 디파이가 실물 가치의 중개를 대규모로 수행하려면 컴플라이언스는 사후적으로 덧붙이는 옵션이 아니라 시장 설계에 내장돼야 한다.
이 때문에 기관형 디파이에서 가장 중요한 패턴으로 ‘허가형 담보 + 무허가형 유동성’의 하이브리드 아키텍처가 부상한다. 토큰화된 RWA는 스마트컨트랙트 단계에서 승인된 참여자에게만 이전·사용되도록 제한할 수 있고, 차입은 폭넓게 쓰이는 스테이블코인과 공개 유동성 풀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 신원·적격성 점검은 자동화하고, 자산의 출처와 밸류에이션 기준도 강제할 수 있으며, 필요할 때 감사 흔적을 제공하되 모든 운영 디테일을 퍼블릭 체인에 노출하지 않는 구조가 가능해진다. 결과적으로 기관은 수탁(custody), 투자자 보호, 제재 준수 같은 핵심 요건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디파이의 장점인 유동성과 조합성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종합하면, 디파이는 단지 기관 자금을 끌어들이는 단계가 아니라 기관의 제약에 의해 ‘재설계’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여전히 시장의 표면적 서사는 리테일 사이클과 토큰 변동성에 집중되지만, 그 아래에서는 담보가 이동하고 수익률이 거래되며 규제가 운영화되는 고정수익 스택이 만들어지는 중이다. 토큰화가 1단계였다면, 2단계는 자산이 ‘진짜 금융상품처럼’ 행동하도록 만드는 수익률 시장과 리스크 통제의 구축이다. 이 전환이 성숙하면, 대화의 초점은 크립토 ‘채택(adoption)’에서 자본시장 ‘이주(migration)’로 옮겨갈 가능성이 크다.
그 변화는 이미 진행되고 있다.
기사요약 by TokenPost.ai
🔎 시장 해석
토큰화는 ‘월가 자금 유입’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며, 기관을 움직이는 핵심은 자산을 디지털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수익률(yield)을 분리·가격화·거래할 수 있는 인프라(2차 수익률 시장) 구축임
기관 참여는 ‘단순 노출 테스트’에서 ‘인프라 수준의 참여’로 이동 중이며, 전통 금융의 레포·담보·재담보·결제/리스크관리(플러밍)를 온체인에서 복제·재설계하는 흐름이 강해짐
퍼블릭 체인의 투명성은 기관에게 운영 리스크(포지션 노출, 청산 공격, 경쟁정보 공개)로 작용해, ZK·선택적 공개·FHE 등 ‘프로그래머블 기밀성’이 기관형 디파이의 전제 조건으로 부상
💡 전략 포인트
‘토큰화된 자산 보유’보다 ‘담보로 굴릴 수 있는가(재사용/차입/헤지)’를 점검: 토큰이 금융상품처럼 행동(financed, risk-managed)할 수 있는 구조가 핵심
하이브리드 아키텍처(허가형 담보 + 무허가형 유동성) 주목: RWA는 참여자/이전 제한으로 규정 준수, 유동성은 스테이블코인/공개 풀로 효율 확보
수익률 분리(원금 vs 수익 흐름) 및 온체인 가격화 여부 체크: 듀레이션 관리·헤지·구조화 노출 설계가 가능해져 기관 친화적 포트폴리오 구성에 유리
기관 도입의 병목은 ‘컴플라이언스 내장’과 ‘기밀성’이므로, 신원/제재 스크리닝·감사 가능성·선택적 공개가 설계에 포함된 프로토콜/플랫폼 우선 검토
📘 용어정리
토큰화(Tokenization): 국채·주식 등 실물/전통 자산을 블록체인 상의 토큰으로 표현하는 것
RWA(Real World Assets): 실물경제/전통금융 자산을 온체인으로 옮긴 토큰화 자산
수익률(yield) 금융화/2차 수익률 시장: 자산의 원금과 이자(수익 흐름)를 분리해 가격을 매기고 거래 가능한 시장 구조
레포(Repo): 채권 등을 담보로 단기 자금을 조달하는 전통 금융의 핵심 거래
재담보화(Rehypothecation): 맡긴 담보를 금융기관이 다시 담보로 활용하는 관행
플러밍(Plumbing): 담보 이동, 결제, 청산, 리스크 관리 등 ‘시장 배관’에 해당하는 인프라
허가형(Permissioned) / 무허가형(Permissionless): 참여자 자격을 제한하는 구조 / 누구나 접근 가능한 구조
기밀성(Confidentiality): 잔고·포지션·거래 내역 등 민감정보가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성질
영지식증명(ZK Proof):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도 거래/조건의 유효성만 증명하는 암호기술
선택적 공개(Selective Disclosure): 필요한 대상(감사/규제/과세)에 필요한 범위만 제한적으로 공개하는 방식
완전동형암호(FHE): 암호화된 데이터 상태에서 계산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암호기술
Q.
이 기사에서 말하는 ‘2단계’ 전환(수익률 시장)이 왜 중요한가요?
단순 토큰화(1단계)는 자산을 블록체인에 “올려놓는” 수준이라 기관 입장에선 활용도가 제한적입니다. 반면 2단계는 이자·배당 같은 수익 흐름을 분리해 가격화하고, 담보·차입·헤지 등 전통 금융 전략에 연결할 수 있게 만듭니다. 즉 토큰이 ‘증서’가 아니라 ‘실제 금융상품’처럼 작동하면서 기관 자금이 들어올 수 있는 인프라가 됩니다.
Q.
‘허가형 담보 + 무허가형 유동성’ 하이브리드는 무엇을 해결하나요?
기관은 규정 준수(자격 통제, KYC/제재 스크리닝, 감사 가능성)가 필수라 RWA 담보는 허가형으로 관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유동성은 규모와 효율이 중요해, 스테이블코인 중심의 무허가형 풀을 활용하는 편이 유리합니다. 이 하이브리드는 컴플라이언스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디파이의 유동성과 조합성을 가져오는 절충 구조입니다.
Q.
퍼블릭 블록체인에서 기관의 프라이버시(기밀성) 문제는 어떻게 풀 수 있나요?
기관은 포지션과 거래가 공개되면 청산 공격, 전략 노출, 경쟁 리스크가 커집니다. 그래서 영지식증명(ZK)으로 “유효성만 증명하고 내용은 숨기기”, 선택적 공개로 “감사·규제기관에 필요한 만큼만 제출하기”, FHE처럼 “암호화된 상태로 계산”하는 방식이 논의됩니다. 이는 익명성을 위한 불투명성이 아니라, 규제 준수를 가능하게 하는 ‘프로그래머블 기밀성’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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