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도 심심찮게 들리기 시작한 말이 있다. 비트코인 트레저리 (DAT).
올해 들어 코스닥 상장사들을 중심으로 비트코인을 재무 자산으로 편입하겠다는 공시가 잇따르고 있다. 미국의 스트래티지가 수년에 걸쳐 검증한 모델, 즉 자사 현금을 비트코인으로 전환해 재무 건전성과 주가 부양을 동시에 꾀하는 전략이 국내에도 상륙한 것이다. 투자자들의 반응도 뜨겁다. 트레저리 편입을 발표한 기업의 주가가 단기 급등하는 사례가 반복되면서, 이 전략은 일종의 공식처럼 번지고 있다.
그런데 이 흐름이 무르익는 바로 그 시점에, 블록체인 업계 내부에서는 정반대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암호화폐를 기반으로 설계된 프로젝트들, 즉 이 자산군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블록체인 프로토콜들의 트레저리 운용 실태는 참담하다. 상위 25개 프로토콜의 트레저리를 합산하면 수십억 달러에 달한다. 그런데 그 가운데 93%, 약 52억 달러가 아무런 수익도 창출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 우리 돈으로 7조 원이 넘는 돈이 그냥 앉아 있다.
일반 기업에서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삼성이든 카카오든, 현금성 자산을 보유한 기업은 그것을 굴린다. 채권에 넣거나, 단기 금융상품으로 운용하거나, 전략적 투자처를 찾는다. 묵혀두는 건 경영 실패에 가깝다. 이사회가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데 블록체인 세계에선 이게 관행이다.
구조를 보면 더 놀랍다. 이 트레저리의 약 80%는 해당 프로젝트가 직접 발행한 자체 토큰으로 채워져 있다. 기업으로 치면 자사주를 현금 대신 쌓아두는 셈이다. 실제 유동성을 뜻하는 스테이블코인 비중은 평균 3.6%에 불과하다. 유니스왑의 경우 트레저리 잔고가 약 14억 달러에 달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은 사실상 제로다. 보유 자산의 99.9%가 자체 발행 토큰인 UNI 하나다.
강세장에선 이것이 미덕처럼 보인다. 토큰 가격이 오르면 트레저리도 함께 불어나니까. 재무 보고서가 화려해진다. 하지만 시장이 꺾이는 순간, 이 구조는 덫이 된다.
약세장에서 운영 자금이 필요해지면 프로젝트는 자체 토큰을 팔아야 한다. 그런데 팔면 가격이 내려가고, 가격이 내려가면 트레저리 가치도 쪼그라든다. 유동성이 가장 절실한 순간에 유동성을 구하는 행위 자체가 상황을 악화시킨다. 실제로 이 프로토콜들의 트레저리는 전고점 대비 절반 이하에 머무는 기간이 전체의 57%를 넘는다.
흔히 드는 해명이 있다. 운용 인프라가 부족하다거나, 스마트컨트랙트 리스크가 크다는 식이다. 몇 년 전이라면 들어줄 수 있는 말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기관급 운용이 가능한 온체인 인프라는 이미 충분히 성숙해 있다. 도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쓰지 않는 것이다.
진짜 이유는 거버넌스에 있다. 대부분의 프로토콜은 토큰 보유자들의 투표로 주요 결정을 내리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구조가 의사결정을 더디게 만들고, 논쟁을 회피하게 만들며,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가장 안전한 선택으로 만들어버린다. 집단 의사결정의 고질적인 병폐가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무대 위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국내로 돌아오면, 지금 트레저리 전략을 선언하는 기업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생긴다. 비트코인을 사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그 다음은 생각해봤는가.
트레저리를 갖는 것과 트레저리를 운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전자는 선언이고, 후자는 전략이다. 마이크로스트래티지가 주목받는 건 비트코인을 보유해서가 아니다. 그 보유를 중심으로 전환사채 발행, 프리미엄 차익, 자본 재순환이라는 정교한 구조를 설계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따라 사는 것은 전략이 아니라 모방이다.
블록체인 프로토콜들의 실패는 그 점에서 반면교사가 된다. 자산은 쌓았지만 운용은 없었다. 규모는 키웠지만 지속 가능성은 설계하지 않았다. 결과는 7조 원이 잠든 채로 남겨진 트레저리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Aave, Morpho, Gnosis 같은 프로토콜들은 트레저리를 적극적으로 운용하며 자체 토큰 의존도를 낮추고 있다. 이들과 나머지의 격차는 조용하지만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
보유는 시작이다. 운용이 전략이다. 국내 트레저리 기업들이 지금 새겨야 할 교훈이 블록체인 업계 한복판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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