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패권의 토대가 예상보다 더 약해졌다" — 아이켄그린이 경고하는 통화 질서의 균열

| 권성민

이란 전쟁 발발 이후 달러가 안전자산으로서의 지위를 재확인하며 반등하고 있다. 그러나 UC버클리 경제학자 배리 아이켄그린은 이 반등이 달러 패권의 구조적 쇠퇴를 되돌리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그의 신간 『국경을 넘는 돈: 크로이소스에서 암호화폐까지(Money Beyond Borders: Global Currencies from Croesus to Crypto)』는 2,500년 국제통화사를 통해 오늘을 진단한다.

전쟁 이후에도 달러는 왜 '기대만큼' 오르지 않았나

이란 전쟁 발발 직후 이틀간 달러는 약 1.5% 강세를 보였다. 아이켄그린은 이 수치를 오히려 이상하게 본다. 역대 지정학적 충격 대비 너무 미미하다는 것이다. 달러가 회복된 것이 아니라, 충격의 크기에 비해 달러가 충분히 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본질이다.

"달러가 세계 지배적 기축통화로서 세속적 쇠퇴 추세에 있다는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란 전쟁부터 관세 혼란, 국내 정치 불확실성까지, 트럼프 행정부의 행동이 세계로 하여금 달러 의존도를 줄이도록 유도하고 있다." — 배리 아이켄그린

패권 통화의 조건 — 경제 규모를 넘어선 '제도적 신뢰'

아이켄그린이 신간에서 강조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기축통화의 조건은 단순히 경제 규모나 무역 비중이 아니다. 법치주의, 권력 분립, 중앙은행 독립성, 채권자·투자자 보호 같은 국내 제도적 요인이 결정적이다.

그는 로마 공화정의 원로원이 재산을 가진 엘리트들로 구성되어 통화 안정에 이해관계를 가졌던 것을 예로 든다. 민주주의에서는 시민들이 통화 안정을 해치는 정부를 선거로 심판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어떤가. 트럼프가 달러 지폐에 서명하면서 동시에 평가절하를 원한다면, 누가 막을 수 있는가. 의회인가, 법원인가.

동맹 정치의 붕괴가 달러를 흔든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달러가 기축통화로 자리 잡은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마셜 플랜과 NATO로 구축된 동맹 네트워크였다. 1960년대 금-달러 페그제가 압력을 받을 때 일본과 독일이 달러를 지지한 것은 미국의 군사·안보 우산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지금 그 동맹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가 NATO를 '종이호랑이'라 부르고 탈퇴 가능성을 시사하는 상황에서, 아이켄그린은 경고한다.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한 해상 교통을 보장할 전략이 미국에 없다는 것은 단순히 군사력의 문제가 아니라, 일관된 전략과 동맹 연대 부재를 드러낸다.

아이켄그린이 제시한 달러 패권 약화의 5대 구조적 요인: 법치·권력 분립 등 국내 제도적 기반 약화 / 고금리 속 재정적자 확대와 불안정한 부채 경로 / 동맹 정치 후퇴 및 지정학적 리더십 공백 / 일관성 없는 통화·무역 정책 / 연준 독립성에 대한 지속적 공격

위안화는 대안이 되기 어렵다 — 그렇다면 유로와 디지털 통화는?

중국 경제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위안화의 국제화는 정치적 장벽에 막혀 있다. 권력 분립과 법치의 부재, 공산당 정치국의 임의적 결정이 지배하는 구조에서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위안화 자산을 안심하고 보유하기는 어렵다. 아이켄그린은 이 구조적 한계가 단기간에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본다.

유로화는 잠재력이 있지만 조건이 있다. 자본시장 통합 완성, 독자적 국방력 구축, EU 채권 발행 확대 —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마지막 조건은 EU 조약 개정을 요구해 난관이 크다.

흥미로운 대목은 디지털 기술의 역할이다. 블록체인과 분산원장 기술은 스위스 프랑, 한국 원화, 싱가포르 달러 같은 비기축통화들도 국제 결제에 더 효율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인프라를 제공한다. 아이켄그린은 순수 암호화폐보다 CBDC와 토큰화된 은행 예금의 조합이 미래 결제 레일을 지배할 것으로 전망한다.

빙하가 녹듯, 그러나 한 덩어리가 갑자기 떨어질 수 있다

아이켄그린은 달러 패권의 쇠퇴를 천천히 녹는 거대한 빙하에 비유한다. 평소에는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녹지만, 외부 충격이 가해지면 거대한 덩어리가 갑자기 분리될 수 있다. 달러 신뢰가 급격히 붕괴하면 대체 통화가 없는 상황에서 금리는 폭등하고, 21세기 세계화 자체가 위협받는다.

그는 확률을 수치로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말한다. "내 평생 지금처럼 이 악몽 시나리오에 가까이 온 적이 없다고 느낀다."

"투자자들에게 전하는 조언은 두 가지다. 역사를 더 많이 읽어라. 그리고 내 지도교수 제임스 토빈이 포트폴리오 이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말을 기억하라 —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마라.'" — 배리 아이켄그린

한국 독자에게 주는 함의

아이켄그린의 분석은 한국 시장에 여러 시사점을 던진다. 달러 의존 수출 구조와 원화 환율 변동성, 외환보유고 운용 전략, 그리고 디지털 자산·CBDC 정책까지.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가 국내에서 시작된 지금, '달러 이후'의 결제 인프라를 누가 선점하느냐는 단순한 기술 경쟁이 아니라 통화 지정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기축통화의 역사는 결국 신뢰의 역사다. 그리고 신뢰는 규모보다 제도에서 나온다. 2,500년의 역사가 오늘 서울의 투자자와 정책입안자에게 건네는 메시지다.

본 기사는 시장 데이터 및 차트 분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에 대한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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