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1일, 신현송 제28대 한국은행 총재가 공식 취임했다. 그의 이력은 이 자리에 어울린다. 2014년부터 '중앙은행들의 중앙은행'으로 불리는 국제결제은행(BIS)에서 수석 이코노미스트 겸 통화경제국장을 맡아 전 세계 금융안정과 통화정책 연구를 이끌어왔다. BIS에서 10년 넘게 글로벌 통화 질서를 설계한 인물이 이제 한국 통화정책의 수장이 됐다.
그런데 취임사를 읽는 시장 참여자들이 주목한 것은 발언의 내용만이 아니었다. 무엇이 빠져 있는지였다.
취임사에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언급 자체가 없었다. 청문회 과정에서 스테이블코인과 CBDC의 병행 가능성을 인정했던 그가, 정작 취임 첫 공식 발언에서는 이를 의제에서 제외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다. 선택이다.
■ '프로젝트 한강'이 중심이다
신 총재가 취임사에서 디지털 통화 관련 핵심 의제로 꺼낸 것은 분명했다. 프로젝트 한강 2단계 사업을 통해 CBDC와 예금토큰 활용도를 높이고, 아고라 프로젝트 등 국제협력을 통해 디지털 지급결제 환경에서도 원화 위상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프로젝트 한강의 구조는 이렇다. 한국은행이 기관용 CBDC를 발행하고, 시중은행이 이를 기초로 예금토큰을 찍어 소비자에게 유통하는 구조다. 민간의 창의성을 허용하되, 발행의 근원은 중앙은행이 쥐는 방식이다. 통화주권을 지키면서 디지털화를 수용하는 설계다.
이창용 전 총재는 "프로젝트 한강은 사실 신현송 차기 총재가 BIS 재직 시절부터 워낙 가깝게 논의하고 디자인했다"며 "진짜 전문가가 오신다"고 말한 바 있다. 후임자가 아니라, 설계자가 직접 집행을 맡게 된 것이다.
■ 스테이블코인을 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의 디지털 자산 업계 입장에서 이 취임사는 복잡하게 읽힌다. 신 총재는 암호화폐 시장과 비은행 금융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24시간 외환 거래를 위한 통화 시장 현대화를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디지털 금융의 확장은 인정하되, 그 통제권은 중앙은행 체계 안에 두겠다는 의지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누락은 단순한 생략이 아니다.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이미 달러 스테이블코인 중심으로 재편이 빠르게 진행 중이다. 미국은 GENIUS Act를 통해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해외 확산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려 한다. 이 흐름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없다는 것은, 한국이 이 경쟁에 아직 참여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달러화 집중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한국이 단순히 추세에 편승해 자국 스테이블코인을 서둘러 발행하는 것이 반드시 최선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신 총재의 판단은 그 선상에 있다. CBDC 인프라를 먼저 탄탄히 다지고, 그 위에 디지털 원화 생태계를 설계하겠다는 것이다.
신중한 접근이다. 하지만 시장은 신중함을 기다리지 않는다.
■ 그가 가진 무기, 그리고 당면 과제
원달러 환율은 3월 한때 1,500원선을 돌파하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7년 만에 처음으로 심리적 저항선을 넘었다. 중동 지역 긴장 고조와 글로벌 지정학적 불확실성, 미국의 관세정책 급변이 한꺼번에 겹친 결과였다. 현재도 1,470~1,480원대의 높은 변동성이 이어지고 있다. 그에게 디지털 화폐 전략을 설계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오늘 당장 환율을 잡아야 한다.
신 총재는 취임사에서 "중동전쟁에 따른 공급충격으로 물가와 성장 경로의 불확실성이 한층 커진 만큼, 신중하고 유연한 통화정책 운영을 통해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도모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신중하고 유연한'은 모호하게 들리지만, 중앙은행의 언어에서 이것은 정교한 선택이다. 금리를 내리자니 환율이 불안하고, 동결하자니 성장이 식는다. 어느 쪽도 쉽지 않다는 현실 인식이 담겨 있다.
BIS에서 쌓아온 그의 무기는 하나다. 글로벌 금융 네트워크와 이론적 깊이다. 아고라 프로젝트를 포함한 국제 공조 채널은 그가 누구보다 잘 아는 지형이다. 위기의 시대에 중앙은행 총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국제적 신뢰라면, 신현송은 그것을 가지고 출발한다.
■ 한국 시장이 읽어야 할 것
신현송 체제의 한국은행은 디지털 자산 시장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취했다. 장려하지 않는다. 허용하되, 통제한다. CBDC 위에 쌓는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기다리던 업계에는 실망스러운 출발이다. 그러나 이것이 영구적 입장인지, 순서의 문제인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신 총재가 청문회 과정에서 제기된 이해상충 우려를 씻어내기 위해 "모든 해외 자산을 처분하겠다"고 한 약속을 어떻게 투명하게 이행하느냐가 신현송호의 첫 번째 시험대가 될 수 있다. 정책보다 신뢰가 먼저다. 그 신뢰가 쌓여야, 그의 디지털 화폐 구상도 시장의 수용성을 얻을 수 있다.
그는 설계자다. 이제 집행자가 됐다. 설계도와 현실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시장은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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