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상반기, 한국 금융·핀테크 전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단순한 사업 확장이 아니다. 전통 자산운용사(미래에셋), 중견 증권사(한화투자증권), 결제 슈퍼앱(토스), 크립토 네이티브 VC(해시드)가 저마다의 출발점에서 같은 종착점—원화 기반 디지털자산 경제의 핵심 레이어—을 향해 수직·수평으로 영토를 넓히고 있다. 디지털자산기본법 2단계가 연내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법 시행 전 라이선스·인프라·고객 기반을 먼저 깔아두는 자가 다음 10년 주도권을 갖는다'는 공식이 네 진영을 동시에 움직이게 만들었다.
미래에셋 — '미래에셋 3.0', 원화거래소부터 글로벌 ETP까지 수직계열화
가장 넓은 스펙트럼을 한 번에 틀어쥐려는 쪽은 미래에셋이다. 전자공시시스템 공시에 따르면, 미래에셋그룹의 비금융 계열사 미래에셋컨설팅은 지난 2월 이사회 결의로 코빗 주식 약 2,690만 주를 1,335억원에 취득하기로 했다. 코빗 지분 92.06%에 해당하는 규모다. 인수 주체가 비금융 계열사인 것은 '금가분리' 행정지도를 우회하기 위한 포석이다.
국내 원화거래소 라이선스 확보는 출발점일 뿐이다. 스트레이트뉴스가 지난 4월 15일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미래에셋증권 홍콩법인은 같은 날 홍콩 증권선물위원회(SFC)로부터 '디지털자산 리테일 라이선스(VA License Uplift)'를 최종 승인받았다. 국내 증권사 최초이며, 오는 6월 MTS를 오픈해 홍콩 내 개인 투자자를 대상으로 디지털자산 거래 서비스를 정식 출시할 예정이다. 9년 만의 해외 법인 확장(일본·호주)까지 동시에 진행 중인 점을 감안하면, 미래에셋이 그리는 그림은 코빗(원화거래소) → 홍콩(리테일 디지털자산) → GlobalX(BTC·ETH ETP) → 아바랩스(온체인 펀드 토큰화) → 에레보르(미국 디지털 은행) 로 이어지는, 국내 어느 그룹도 시도하지 않은 전방위 수직 통합이다.
핵심 노림수는 RWA 유통 플랫폼 선점이다. 해외 시큐리타이즈·엑스스톡 사례처럼 토큰화 증권은 기존 증권사 외 별도 RWA 플랫폼을 통해 유통될 가능성이 높고, 미래에셋이 거래소를 미리 선점해 유통 플랫폼을 구축하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나온다. 다만 변수는 남아 있다. 아시아투데이 보도에 따르면, 정부가 추진 중인 거래소 대주주 지분 20% 제한 규정이 시행될 경우 점유율이 낮은 코빗·코인원은 6년의 유예기간을 받지만, 미래에셋은 70%가 넘는 지분을 어떤 형태로든 처분해야 하는 구조에 놓이게 된다.
한화투자증권 — 'TraDeFi'로 전문 증권사 전환, RWA 허브를 노리다
한화투자증권의 전략은 '규모' 대신 '전문화'다. ETHCapital 2026 현장 발언을 보면, 손종민 한화투자증권 미래전략실장은 전통 금융의 신뢰와 디지털자산의 효율을 결합한 '한화 TraDeFi' 개념을 공식화했다. 같은 보도에 따르면 회사는 지난해 말 '2026년 경영전략회의'에서 '디지털자산 전문 증권사' 전환을 중장기 목표로 내걸고 'Global No.1 RWA Hub' 비전을 공식 선포했으며, 자체 디지털자산 플랫폼은 이르면 2027년 초 공개를 목표로 개발 중이다.
기술 파트너 축은 이미 완성됐다. 한화투자증권은 지난해 12월 아부다비 파이낸스 위크(ADFW 2025)에서 미국 디지털 지갑 기업 크레서스(Kresus)와 MOU를 체결했다. 크레서스는 금융기관 특화 블록체인인 캔톤 네트워크(Canton Network) 기반 토큰화 인프라와 멀티체인 지갑 플랫폼을 보유한 기업이다. 이어 EBN이 2월 보도한 바에 따르면, 한화투자증권은 크레서스에 180억원 규모의 전략 투자를 단행하며 단순 MOU를 지분 관계로 격상시켰다. 데이터 축에서는 쟁글(Xangle)에 100억원을 먼저 투자해 리서치·온체인 데이터 인프라도 확보했다.
차별 포인트는 사모시장 RWA다. 기관투자가만 접근하던 부동산·IP 등 사모 자산을 토큰화해 리테일 브로커딜러 플랫폼으로 공급하겠다는 구상이다. 미래에셋이 '거래소+ETP+글로벌 월렛'의 B2C 수직 통합이라면, 한화는 B2B 토큰화 인프라 + HNW(고액자산가) 리테일이라는 협소하지만 마진이 두꺼운 지점을 겨냥한다.
토스 — '화폐 3.0', 3,000만 사용자 위에 쌓는 스테이블코인 결제 레이어
토스는 지난 3월 12일 서울 섬유센터에서 열린 '2026 블록체인 밋업 컨퍼런스'에서 '화폐 3.0, 토스가 여는 다음 시대'를 주제로 미래 비전을 발표했다. 토스가 블록체인 행사에 참가한 것도, 스테이블코인 관련 전략을 외부에 공개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서창훈 신사업담당 상무는 화폐 3.0의 다섯 가지 핵심 특성으로 보편성·프로그램 가능성·검증 가능성·조합 가능성·경계의 초월을 제시하며, 3,000만 명의 사용자가 별도 지갑 생성 없이 'Day 1'부터 일상 사용자로 전환되는 구조가 가장 강력한 경쟁우위라고 강조했다.
토스의 전략은 다른 세 플레이어와 결이 다르다. 미래에셋·한화가 '자산관리'를, 해시드가 '인프라'를 붙잡는다면, 토스는 결제를 핵심 레이어로 본다. 토스는 2026년까지 토스플레이스 결제 단말기 50만 대, 2027년까지 70만 대를 전국에 보급해 온·오프라인을 아우르는 결제 생태계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더 중요한 건 이미 PoC를 마쳤다는 점이다. 파이낸셜뉴스 보도에 따르면, 토스는 이달 초 '소상공인 디지털자산 상생대출 프로젝트' 기술검증을 내부적으로 완료했다. 토스의 개인사업자 신용평가모형 소호스코어(SohoScore)와 블록체인 스마트 컨트랙트를 결합해, 대출 실행 후 신용점수가 개선되면 별도 금리인하요구권 행사 없이도 대출 금리가 자동 인하되는 구조다. 스테이블코인을 '투자 상품'이 아니라 '프로그래머블 머니로서 실제 금융상품에 탑재되는 원자재'로 다루고 있다는 신호다.
해시드 — '마루', 원화 스테이블코인 전용 소버린 L1
해시드는 VC에서 인프라 빌더로 정체성을 재정의했다. 이데일리의 보도에 따르면, 해시드 산하 해시드 오픈 파이낸스는 지난 1월 22일 한국 원화 경제를 위한 블록체인 '마루(Maroo)'의 라이트페이퍼를 공개했다. 마루는 퍼블릭 블록체인의 개방성과 확장성을 유지하면서 금융권이 요구하는 규제 준수 체계와 감사 가능성, 프라이버시 보호를 함께 고려해 설계된 소버린 레이어1(Sovereign L1) 블록체인이다.
설계의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네이티브 가스토큰으로 사용해 별도 가상자산 없이도 체인을 쓸 수 있게 했다. 둘째, 이데일리 보도 기준 ▲누구나 지갑을 만들어 거래할 수 있는 '개방 경로'를 기본으로 두는 듀얼 트랙 구조 ▲거래 시점에 한도·KYC·제재 대상 여부를 자동 판단하는 프로그램형 컴플라이언스 레이어 ▲영지식 증명 기반 '검증 가능한 프라이버시' 구조를 모두 도입했다. 셋째, AI 에이전트 전용 계정 구조(AAA)를 통해 머신 이코노미 표준을 선점하겠다는 포석이다.
이투데이는 해시드의 전략을 "특정 플랫폼 의존을 배제한 주권형 블록체인 전략"으로 평가하며, 공공 인프라나 국가 단위 디지털 금융망(B2G) 구축 논의에 대응하려는 전략적 포지셔닝이라고 분석했다. 흥미로운 대척점은 두나무의 L2 기반 '기와(Kiwa)' 전략이다. 업비트 유동성을 L2로 흡수하려는 플랫폼형 접근과, 통화·컴플라이언스까지 재설계하는 주권형 L1 접근이 국내 원화 스테이블코인 주도권을 두고 정면 충돌한다.
판을 바꿀 변수 — 디지털자산기본법 2단계
네 플레이어가 동시에 움직이는 진짜 배경은 법제화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3월 4일 '2026년 제1차 가상자산위원회'를 열고 디지털자산기본법 정부 검토안을 논의했다. 거래소 대주주 지분을 15~20% 수준으로 제한하는 안과, 은행 지분이 50%+1주를 넘는 컨소시엄을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로 두는 안이 함께 테이블에 올랐다. 더불어민주당 디지털자산TF는 1월 28일 2차 비공개회의를 열고 여당안 조율을 완료했으며, 입법명을 '디지털자산기본법'으로 확정해 설 연휴 전 발의를 목표로 잡았다.
쟁점은 둘이다. (1) 원화 스테이블코인 51% 룰 — 은행 중심 컨소시엄만 발행을 허용할지 여부. 통과되면 해시드의 '금융지주 컨소시엄 마루 체인'과 토스의 '빗썸 스테이블코인 사업 결합 검토'가 직접적 수혜 구도를 형성한다. (2) 거래소 대주주 지분 20% 룰 — 미래에셋의 코빗 92% 지분 구조에 직격탄이지만, 금가분리 완화가 병행되면 증권 계열사 편입으로 전환이 가능해진다.
법무법인 화우의 분석에 따르면, 업계는 2026년 내 2단계 입법이 통과될 것으로 예상하며 디지털자산기본법의 세부 시행령과 감독 규정이 현장에 적용되는 '법 집행의 원년'이 될 것으로 본다. 스테이블코인 등 지급결제형 가상자산은 2단계 입법을 통해, 증권형 토큰(토큰증권)은 자본시장법·전자증권법 개정을 통해 각각 규율될 전망이다.
네 진영의 충돌 지점은 어디인가
2027년을 시뮬레이션하면 충돌은 세 지점에서 발생한다. 첫째, RWA 토큰 유통 플랫폼에서 미래에셋(코빗 기반)과 한화(크레서스 기반)가 맞붙는다. 둘째, 원화 스테이블코인 결제 레일에서 토스와 해시드가 만난다. 토스는 앱 레이어에서, 해시드는 체인 레이어에서 각각 표준이 되려 한다. 셋째, AI 에이전트 금융 자동화에서 토스(자비스형 AI 비서)와 해시드(AAA 계정 구조)가 비슷한 그림을 다른 방식으로 제시한다.
진짜 변수는 경쟁이 아니라 결합일 수 있다. 해시드의 마루 위에 토스가 결제 애플리케이션을 올리고, 미래에셋의 RWA 상품이 한화의 브로커딜러 플랫폼으로 유통되는 구도 역시 가능성 범위 안에 있다. 2026년 남은 8개월은 각 플레이어가 어떤 스택을 자체 구축할지, 어디서 합종연횡할지를 결정짓는 창이 될 것이다.
법 시행 이후에는 더 이상 '포지션 선점'이 아닌 '자본·고객·데이터'의 규모 경쟁이 시작된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늦다는 판단—그것이 전혀 다른 네 기업이 동시에 같은 속도로 달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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