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新 트릴레마’

| 토큰포스트

블록체인에는 오래된 트릴레마가 있다. 탈중앙성, 보안성, 확장성 가운데 셋을 동시에 만족시키기 어렵다는 명제다.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양보해야 한다. 기술의 세계에서도 공짜 점심은 없다.

이제 같은 질문이 통화의 영역으로 넘어오고 있다. 미국 워싱턴대 올린경영대학원의 린다 쉴링 교수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새로운 트릴레마를 제기했다. 통화주권, 동등성, 보유자 보호를 동시에 충족하는 국경 간 스테이블코인 설계는 어렵다는 것이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국경을 넘어 확산될수록 각국의 통화주권은 약화되고, 위기 상황에서 보유자가 같은 조건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지도 불확실해진다.

그러나 한국의 질문은 조금 다르다. 쉴링 교수의 논의는 미국과 유럽이라는 두 거대 통화권 사이의 문제에 가깝다. 달러와 유로라는 강한 통화, 거대한 시장, 독자적 관할권을 가진 주체들의 균형 문제다. 한국은 그 구도에 없다. 우리는 달러 발행국도 아니고, 유로존 같은 통화 블록도 아니다. 따라서 한국이 먼저 물어야 할 것은 “글로벌 바스켓의 한 축이 될 수 있는가”가 아니다. 디지털 결제 질서에서 원화의 제도적 지위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다.

본지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트릴레마를 통화주권(Monetary Sovereignty), 시장수용성(Market Adoption), 환매 안정성(Redemption Stability)으로 본다. 원화의 디지털 지위를 지켜야 하고, 실제 시장에서 채택될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언제든 원화로 상환될 수 있다는 제도적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이 세 조건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성공하기 어렵다.

첫째는 통화주권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가상자산 상품이 아니다. 디지털 경제에서 원화가 결제와 정산의 언어로 남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지금까지 원화는 현금, 은행 예금, 카드망, 계좌이체망을 통해 유통됐다. 그러나 앞으로 송금, 정산, 전자상거래, 콘텐츠 결제, 디지털 자산 거래가 토큰화된 인프라 위에서 이뤄진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 인프라 안에 원화가 없다면, 결제 질서는 자연스럽게 달러 스테이블코인 중심으로 재편된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분명 결제 혁신이다. 국경 간 송금과 정산을 빠르게 하고, 기존 금융망보다 낮은 비용으로 이동할 수 있다. 문제는 그 혁신이 한국에는 동시에 디지털 달러라이제이션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편리한 돈은 국경을 쉽게 넘고, 한 번 표준이 되면 쉽게 바뀌지 않는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늦추면 한국의 디지털 결제 인프라는 달러 위에서 작동할 가능성이 커진다. 외환위기처럼 요란하지는 않지만, 더 조용하고 오래가는 종속이다.

둘째는 시장수용성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발행됐다는 사실만으로 채택되지 않는다. 정부가 허가하고 금융회사가 발행한다고 해서 시장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거래소, 지갑, 결제사업자, 핀테크, 전자상거래, 콘텐츠 플랫폼, 기업 간 정산망에서 실제 효용을 보여줘야 한다. 결제 비용을 낮추고, 정산 속도를 높이며, 기존 결제수단보다 분명한 이점을 제공해야 한다.

관 주도의 폐쇄형 원화 토큰은 제도적으로 안전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시장수용성이 낮으면 성공한 금융혁신이 아니라 관리 가능한 실패작에 그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정책 전시물이 아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과 경쟁해야 하는 결제 인프라다.

셋째는 환매 안정성이다. 스테이블코인의 본질은 이름이 아니라 상환 능력이다. 1원에 연동된 토큰이 실제로 1원으로 환매될 수 있는가. 준비자산은 안전하고 유동적인가. 발행사가 흔들릴 때 보유자는 보호받을 수 있는가. 환매 요구가 집중될 때 지급불능 위험을 막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디지털 원화가 아니라 원화 표시 민간채무에 불과하다.

이 세 조건은 서로 충돌한다. 통화주권과 환매 안정성만 강조하면 은행과 감독당국 중심의 폐쇄적 구조가 되기 쉽다. 안정성은 높아질 수 있지만 시장의 채택은 제한된다. 시장수용성과 속도만 강조하면 민간 발행사가 난립하고 준비자산 관리가 부실해질 수 있다. 환매 안정성과 시장수용성만 좇으면 가장 쉬운 선택은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원화의 디지털 지위를 약화시키는 길이다.

따라서 한국의 과제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만들 것이냐”가 아니다. 어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어떤 제도 아래 만들 것이냐다.

원칙은 분명해야 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국내 제도권 안에서 발행돼야 한다. 발행사는 한국의 인가를 받고, 준비자산은 한국 감독당국이 실질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하며, 환매권은 한국 법체계 안에서 보호돼야 한다. 해외 유통은 필요하다. 무역 정산, 해외 송금, 콘텐츠 결제, 동아시아 디지털 결제망에서 원화가 쓰이려면 국경 밖 유통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발행과 준비자산, 최종 환매 책임의 뿌리는 한국에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역외 발행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경계해야 한다. 해외 법인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고, 준비자산을 해외 금융기관에 두며, 분쟁을 해외 법원이 판단한다면 그것은 디지털 원화가 아니다. 원화 표시 채무의 역외 발행이다. 원화의 국제화처럼 보일 수 있지만, 설계가 잘못되면 원화 발행·환매 질서의 역외 종속으로 이어질 수 있다. 원화라고 표기돼 있다고 해서 원화 주권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에 대해서도 현실적 접근이 필요하다. 금지는 간단한 구호지만 실효성은 낮다. 이미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글로벌 디지털 금융의 주요 결제망이 됐다. 이를 일률적으로 차단하면 시장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해외로 이동한다. 답은 금지도 방임도 아니다. 주권형 규칙에 따른 조건부 공존이다.

한국 시장에서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유통하려면 한국 이용자 보호 장치를 요구해야 한다. 준비자산과 환매 절차를 공개하게 하고, 국내 대리인과 분쟁 처리 절차를 두게 해야 한다. 환매 중단이나 자산 동결이 발생했을 때 한국 보유자가 일방적으로 불리한 지위에 놓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국 시장에 접근하려면 한국 이용자를 보호할 책임도 져야 한다. 이것은 보호주의가 아니라 금융 질서의 기본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방어 수단이면서 동시에 협상 수단이다. 국제 결제 인프라는 토큰화된 예금, 중앙은행 화폐, 스테이블코인, 스마트계약 기반 정산망이 결합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구조에서 원화 기반 디지털 결제 수단이 없다면 한국은 논의의 주체가 아니라 관전자가 된다.

완전한 통화주권은 현실적 목표가 아닐 수 있다. 달러 중심의 국제 금융질서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지킬 수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지키지 않는 것은 정책이 아니다. 한국이 지켜야 할 것은 통화주권의 절대적 순결성이 아니라 비대칭 손실의 방지다. 위기 때 한국 보유자가 외국 보유자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하고, 한국 법이 한국 이용자를 보호할 최소한의 관할권을 확보하며, 국내 통화정책이 달러 스테이블코인 유통에 일방적으로 잠식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블록체인의 트릴레마가 기술 설계의 문제였다면,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트릴레마는 국가 전략의 문제다. 한국은 통화주권, 시장수용성, 환매 안정성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발행해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빨리 만드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시장에서 채택될 수 있어야 하고, 환매가 보장돼야 하며, 발행과 감독의 핵심 권한은 한국 제도 안에 있어야 한다.

디지털 결제 질서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국이 원화의 자리를 설계하지 않으면, 그 자리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차지할 것이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결제 혁신인가, 디지털 달러라이제이션인가. 답은 한국의 제도 설계에 달려 있다. 혁신으로 활용하려면 주권형 규칙이 필요하다. 방임하면 종속이 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문제는 코인 하나를 만들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디지털 시대에도 원화가 결제와 정산의 언어로 남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본 기사는 시장 데이터 및 차트 분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에 대한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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