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이 다시 국제 통화 질서의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단순한 가격 등락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자산시장의 유행이 아니라 돈의 질서가 바뀌는 과정이다. 금이 다시 중앙은행의 언어가 되고, 비트코인이 민간과 국가의 전략 자산으로 부상하고 있다. 세계는 이미 “무엇이 돈을 지탱하는가”라는 근본 질문으로 돌아갔다.
오스트리아계 리서치 기관 인크리멘텀의 2026년 《In Gold We Trust》 보고서는 올해 주제를 “Back to the Monetary Future”라고 잡았다. 미래의 돈은 과거의 돈에서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보고서는 1971년 금태환 중단,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대규모 통화 팽창이 오늘의 시장 질서를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또 1945년 이후 세계를 지배해온 미국 중심의 정치·군사·통화 질서,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나’가 종말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고 진단했다.
핵심은 신뢰다. 보고서는 정부와 중앙은행, 법정화폐 체제에 대한 신뢰 약화가 금 가격 상승의 중심 동력이라고 봤다. 2007년 첫 보고서가 나왔을 때 온스당 670달러 수준이던 금은 2026년까지 거의 7배 올랐다. 같은 기간 달러와 유로의 구매력은 금 기준으로 각각 85.3%, 87.4% 하락한 것으로 제시됐다. 종이돈의 가치는 서서히 녹고, 경성 자산의 존재감은 커졌다.
이 흐름에서 비트코인은 더 이상 주변부 자산이 아니다. 보고서는 금과 비트코인을 경쟁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경성 자산으로 본다. 금은 오랜 신뢰와 안정성의 자산이고, 비트코인은 디지털 희소성과 이동성을 가진 자산이다. 보고서는 비트코인이 “중립적이고 규칙 기반의 네트워크”로서 미래 화폐의 한 축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또 금의 재통화가 진행될수록 비트코인도 함께 주목받을 수 있으며, 언젠가는 중앙은행들이 금과 함께 소규모 전략적 비트코인 포지션을 구축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미국의 움직임도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지난 21일 미 하원에서는 닉 베기치 의원과 재러드 골든 의원이 ‘미국 비축자산 현대화법’(ARMA)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미 재무부 내 전략적 비트코인 비축을 법률로 설치하고, 연방정부가 보유한 디지털 자산의 관리와 공시 체계를 정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트코인은 최소 20년 보유하도록 하고, 세금·재정적자·국가부채를 늘리지 않는 방식의 추가 취득 전략을 연구하도록 했다.
미국은 비트코인을 단순한 투기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적어도 의회 일각은 이를 국가 재무제표와 금융 주권, 장기 경쟁력의 문제로 보기 시작했다. 한 의원은 비트코인을 “디지털 금”이라고 불렀고, 다른 의원들은 미국이 이미 보유한 압수 비트코인을 전략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 금 보유가 국가 신용의 상징이었다면, 디지털 시대에는 비트코인 보유와 관리 능력도 국가 전략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이다.
작은 나라들도 움직이고 있다. 부탄은 잉여 수력을 활용해 비트코인을 채굴해온 국가로 알려져 있다. 노르웨이가 북해 석유로 국부를 쌓았다면, 부탄은 수력과 디지털 자산을 결합해 새로운 형태의 국부 실험을 하고 있다. 이란처럼 달러 결제망의 제약을 받는 국가들이 비트코인 등 비허가형 결제 수단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같은 흐름이다. 달러 체제 바깥의 통로를 찾는 나라들은 금과 비트코인을 함께 본다.
민간 자본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글로벌 기업들은 비트코인을 재무 전략의 일부로 검토하고, 자산운용 업계는 금과 비트코인을 결합한 상품을 내놓고 있다. 인크리멘텀 보고서는 2025년 칸토 피츠제럴드가 금 기반 하방 보호를 결합한 비트코인 펀드를 출시했고, 2026년 21셰어스가 런던증권거래소에 금과 비트코인을 결합한 BOLD ETF를 상장했다고 설명했다. 금과 비트코인을 함께 보유하는 전략이 하나의 투자 개념으로 제도권에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금융위원회는 2025년 법인의 가상자산 거래를 단계적으로 허용하는 로드맵을 내놨다. 그러나 이는 그동안 법인 거래가 원칙적으로 막혀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기도 하다. 우선 비영리법인과 거래소의 현금화 목적 거래를 허용하고, 이후 일부 상장사와 전문투자자를 대상으로 시범 허용하는 방식이다. 일반 기업과 금융회사의 직접 참여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가상자산 현물 ETF 논의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비트코인 현물 ETF를 제도권에 편입한 뒤 이제 국가 비축자산 논의로 넘어가고 있다. 한국은 아직도 투자자 보호와 시장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문을 조금씩만 열고 있다. 물론 신중함은 필요하다. 그러나 신중함과 지체는 다르다. 규제는 있어야 하지만, 규제만 있고 전략이 없으면 산업은 밖으로 나간다.
한국의 문제는 비트코인을 사지 않는 것이 아니다. 비트코인을 무엇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국가적 정의가 없다는 점이다. 미국은 그것을 재무 전략과 금융 주권의 문제로 보기 시작했다. 인크리멘텀 보고서는 금과 비트코인을 탈가치화 시대의 비인플레이션 자산으로 함께 다룬다. 신흥국 중앙은행들은 금을 사들이고, 민간 자본은 비트코인을 장기 보유 자산으로 편입한다. 세계는 이미 새 통화 질서의 언어를 익히고 있다.
한국은 아직도 낡은 단어에 갇혀 있다. 투기, 과열, 금지, 유예. 이 네 단어로는 다음 금융 질서를 설명할 수 없다. 비트코인을 무조건 찬양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국가가 여전히 투기라는 낡은 틀로만 본다면, 산업도 자본도 인재도 한국을 비켜갈 것이다.
금은 과거의 신뢰이고, 비트코인은 미래의 신뢰라는 말이 있다. 지금 세계는 그 둘을 함께 보며 새 질서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도 더 늦기 전에 질문을 바꿔야 한다. “비트코인을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디지털 경성 자산 시대에 한국은 어떤 위치를 차지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인식의 격차가 곧 전략의 격차다. 그리고 전략의 격차는 결국 국부의 격차가 된다.
<저작권자 ⓒ TokenPos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