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한 뒤 노트북을 열었지만 쉽게 첫 문장을 쓰지 못했다.
WebX 2026에서 보고 듣고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기사보다 먼저 떠올랐다. 기사로 정리해야 할 사실보다 복잡한 감정이 먼저 밀려왔다.
마치 남의 잔칫집에 다녀온 뒤 우리 집을 천천히 둘러보는 기분이었다.
부러워서가 아니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미래를 준비하는 방식이 우리와 너무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을 거북이라고 생각했다
출국 전까지 나는 일본을 ‘거북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일본의 일부 은행 창구에서는 종이 서류를 작성하고 도장을 찍는다. 금융 업무와 행정 절차도 한국만큼 빠르지 않다.
반면 한국은 모바일뱅킹과 간편결제, 디지털 서비스 수용 속도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암호화폐에 대한 관심과 거래 규모 역시 세계적인 수준이다.
적어도 디지털 금융만큼은 우리가 토끼였고 일본은 거북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첫날부터 생각이 흔들렸다
WebX 2026 개막식.
대형 화면에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영상 축사가 등장했다.
이어 정부와 정치권, 금융권, 산업계 인사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단순한 의례적 축사가 아니었다.
일본 정부는 Web3를 더 이상 일부 투자자와 기술기업만의 시장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금융과 산업, 그리고 국가 경쟁력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었다.
행사장을 둘러볼수록 그 인상은 더욱 강해졌다.
일본만을 위한 국내 행사가 아니라 세계 금융과 블록체인 산업이 만나는 현장이라는 점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코인베이스, 바이낸스, 온도파이낸스, 프랭클린템플턴, 판테라캐피털, 디지털애셋, 캔톤 네트워크, RWA.xyz….
행사의 개최지는 일본이었지만 무대는 이미 세계 금융시장 전체를 향하고 있었다.
일본의 행사가 아니라 세계 금융의 회의장이었다
행사장에서 가장 많이 들린 단어는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이 아니었다.
스테이블코인, 실물자산 토큰화(RWA), 기관금융, 결제, 상호운용성, AI 에이전트.
과거 크립토 행사가 “어느 코인이 오를 것인가”를 주로 이야기했다면 이번에는 질문 자체가 달라졌다.
주식과 채권을 어떻게 토큰화할 것인가.
은행 예금과 스테이블코인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기관투자자의 정보를 보호하면서 실시간 결제를 구현할 수 있는가.
AI가 계약과 결제를 수행하는 시대에는 어떤 금융 인프라가 필요한가.
더 이상 기술의 가능성만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기술 이후의 금융을 설계하는 자리였다.
인터뷰에서 확인한 공통된 메시지
이번 출장에서는 디지털애셋(Digital Asset)과 온도파이낸스(Ondo Finance), 스타테일(Startale) 등 글로벌 금융·블록체인 기업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회사도 달랐고 국적도 달랐다.
그러나 그들이 강조하는 방향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누구도 코인 가격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가격보다 구조를, 기술보다 연결을, 개별 프로젝트의 경쟁보다 금융시장 전체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이번 출장에서 가장 많이 배운 사람은 어쩌면 나였다
이번 출장에서는 김지호 토큰포스트 대표와 권성민 국장이 글로벌 기업 관계자들과 미팅들을 이어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기회도 있었다.
두 사람은 준비한 질문을 읽는 데 그치지 않았다.
답변 속에서 시장의 흐름을 읽고, 그 답변에서 다시 새로운 질문을 끌어냈다. 서로 떨어져 보이는 기업과 기술, 금융시장의 변화를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해 나갔다.
옆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며 새삼 깨달았다.
인사이트는 자료를 많이 읽는 것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같은 질문을 오랫동안 붙들고 시장의 변화를 지켜본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이번 출장은 취재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금융의 흐름을 배우는 공부였다.
한국도 열심히 뛰고 있다…다만 방향이 문제였다
한국도 결코 멈춰 있는 것은 아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토큰증권(STO), AI와 블록체인.
정부도 고민하고 있다. 금융기관도 준비하고 있다. 스타트업도 밤낮없이 뛰고 있다.
문제는 노력의 부족이 아니었다.
같은 방향으로 뛰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원화 스테이블코인대로 움직인다. 토큰증권은 토큰증권대로 움직이고 AI는 AI대로 논의된다. 은행과 증권사, 거래소도 각자의 플랫폼을 만든다.
각각의 기술과 시도는 훌륭하다.
하지만 그 조각들이 하나의 금융 생태계로 연결되는 그림은 아직 선명하지 않다.
일본 금융권의 메시지는 비교적 분명했다.
서비스에서는 경쟁하되 인프라는 함께 구축한다는 것이다.
개별 금융회사가 각자의 서비스를 개발하면서도 공동 결제망과 표준, 상호운용성에서는 협력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은행과 증권사, 거래소, 블록체인 기업들이 각자의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각자의 속도를 하나의 국가적 방향으로 연결하는 일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차이는 기술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한국은 여전히 묻고 있다.
누가 발행할 것인가.
누가 감독할 것인가.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물론 반드시 필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WebX 무대에서는 이미 그다음 질문이 이어지고 있었다.
발행된 자산은 어디에서 거래되는가.
무엇으로 결제되는가.
은행 시스템과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서로 다른 금융기관과 블록체인 사이에서 자산은 어떻게 이동하는가.
AI가 거래의 주체가 될 때 신원과 책임은 어떻게 설계되는가.
우리가 경기장 입구의 규칙을 논의하는 동안 세계는 이미 경기장 안에서 새로운 경기 방식을 만들고 있었다.
일본에서 확인한 것은 거창한 선언만이 아니었다.
금융기관은 결제와 정산을 준비하고, 자산운용사와 증권사는 토큰화된 자산의 거래와 유통을 고민하고 있었다. 기술기업들은 서로 다른 금융망을 연결할 방법을 제시했다.
정책과 금융, 기술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산업적 공감대는 보였다.
이제 한국은 어떤 길을 만들어야 하는가
단순히 속도만 빠른 토끼로 남지 않으려면 이제는 방향을 함께 정해야 한다.
첫째, 서비스에서는 경쟁하더라도 공동 결제망과 표준, 상호운용성 같은 기반 인프라에서는 협력해야 한다.
은행과 증권사, 거래소와 기술기업이 각자의 플랫폼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하나의 금융 생태계가 완성되지 않는다. 흩어진 조각들을 연결하려면 경쟁을 넘어선 산업적 협력이 필요하다.
둘째, 규제의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누가 발행하고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에서 멈추지 말고, 발행된 자산을 어디에서 거래하고 무엇으로 결제하며 해외 금융망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까지 함께 설계해야 한다.
규제는 혁신을 막는 경계선이 아니라 시장이 안전하게 달릴 수 있는 트랙이 돼야 한다.
셋째, 원화 스테이블코인과 토큰증권, AI 에이전트 결제를 하나의 흐름으로 바라보는 범정부·민간 공동 추진체계가 필요하다.
AI가 스스로 계약하고 결제하는 시대가 다가오는 만큼 신원과 책임, 데이터 보호와 실시간 소액결제를 포괄하는 금융 인프라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한국에 부족한 것은 개별 기술이 아니다.
흩어진 기술과 제도를 하나의 방향으로 연결하고 실제 시장에서 작동하게 만드는 실행력이다.
토끼와 거북이가 다시 생각났다
행사 마지막 날, 토끼와 거북이 우화가 다시 떠올랐다.
한국은 누구보다 빨랐다. 기술도 빨랐고 시장도 뜨거웠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토끼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번 도쿄에서 본 장면은 달랐다.
토끼는 잠든 것이 아니었다.
다만 너무 많은 방향으로 빠르게 뛰느라 하나의 길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거북이는 느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정부와 금융기관, 기업이 비교적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어느새 거북이는 토끼의 곁까지 와 있었다.
남의 잔칫집에서 돌아본 우리 집
취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
이상하게도 뿌듯함과 씁쓸함이 함께 밀려왔다.
학창 시절 도서관에서 밤늦게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처럼 새로운 것을 배웠다는 충만함이 있었다.
동시에 마음 한편은 무거웠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기술이 아니었다.
자본도 아니었다.
인재도 아니었다.
부족한 것은 그 모든 조각을 하나의 국가 전략으로 연결하는 비전과 실행력이었다.
WebX 2026은 내게 단순한 행사가 아니었다.
한국이 앞으로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를 보여준 하나의 교과서였다.
토끼는 여전히 빠르다.
거북이가 이미 이겼다고 말하기에는 이르다.
하지만 이번 도쿄에서 분명히 확인한 것이 있다.
거북이는 쉬지 않았고, 토끼는 방향을 잃고 있었다.
그 장면이 자꾸만 떠오른다.
사진기자와 사진교육자로 살아오며 나는 늘 한 장면이 시대를 어떻게 증언하는지 고민해왔다.
그러나 이번 도쿄에서 내가 본 것은 한순간의 장면이 아니었다.
한 나라가 미래를 준비하는 방식이었고, 산업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과정이었다.
사진은 순간을 기록한다.
기자는 시대의 방향을 기록한다.
이 기사를 쓰는 마음이 무거운 이유다.
그 여운은 부러움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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