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은 ‘탈중앙화’라는 이상에서 출발했다. 은행이나 국가 같은 중앙의 중개자 없이도 가치를 주고받고, 누구도 임의로 기록을 바꿀 수 없는 장부 위에서 개인이 자신의 자산을 직접 통제할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
그런데 이제 블록체인은 또 다른 거대한 전환의 중심에 서 있다. 토큰화(tokenization)다.
토큰화란 자산이나 권리를 디지털 원장 위에서 표현하고 이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기술이다. 주식과 채권은 물론 부동산, 펀드, 인프라 같은 자산도 토큰으로 표현할 수 있다. 거래와 결제를 자동화하고, 기존에 거래하기 어려웠던 자산을 더 작은 단위로 나누며, 시장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가 토큰화를 미래 금융시장의 핵심 인프라로 거듭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블랙록은 토큰화를 자산의 소유권을 디지털 원장에 기록하는 방식으로 설명하며, 부동산과 기업채권 등 다양한 자산의 거래비용을 낮추고 결제 속도와 시장 접근성을 높일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금융 혁신이다.
하지만 질문은 그 다음부터 시작된다.
토큰화할 수 있는 대상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실제로 그 경계는 금융자산을 넘어 자연으로 확대되고 있다.
2024년 미국에서는 뉴욕증권거래소(NYSE)가 ‘자연자산기업(Natural Asset Company·NAC)’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기업을 상장할 수 있도록 규정을 만들려 했다. 숲과 토지 등 자연자산이 만들어내는 생태계 서비스와 관리권을 기업가치와 연결하는 구상이었다. 논란 끝에 NYSE는 2024년 1월 17일 관련 상장규정안을 철회했다. 그러나 자연을 투자 가능한 자산으로 바라보는 흐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계경제포럼(WEF)은 맥킨지와 함께 발표한 2025년 보고서에서 NAC를 비롯해 생물다양성 크레딧, 생태계서비스지불제, 자연 연계 채권·대출 등 자연에 민간자본을 유치할 다양한 금융수단을 제시했다. 자연을 보전해야 할 공공재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투자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자산 영역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블록체인을 직접 결합하는 실험도 진행 중이다. 에스토니아 기반 Single.Earth는 산림의 탄소흡수와 생태계 상태를 평가해 토지 소유자에게 ‘MERIT’ 토큰을 지급하는 모델을 운영한다. 자연이 제공하는 생태적 가치를 디지털 자산으로 바꾸고, 보전 자체에 경제적 보상을 부여하겠다는 발상이다.
파나마에서도 비슷한 방향의 실험이 등장했다. 파나마 환경부와 O.N.E Amazon은 2025년 다리엔 지역의 장기 보전을 위한 협력 의향서를 체결했다. 이 사업에는 산림과 생물다양성을 관측하는 기술과 보전금융 모델이 포함됐고, 향후 ‘자연 기반 디지털 금융수단’을 검토할 가능성도 제시됐다. 다만 현재 단계에서 이를 ‘파나마 정부가 숲을 토큰화해 판매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과장이다. 아직은 협력과 실증, 금융모델 검토 단계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Sango’ 프로젝트는 더욱 노골적인 구상을 내놓은 바 있다. 정부는 금·다이아몬드·철광석을 비롯한 천연자원의 토큰화와 토지 거래를 플랫폼에 포함시키려 했다. 그러나 IMF 분석에 따르면 실제 토큰 판매는 당초 계획에 크게 못 미쳤고 상당수 기능이 구현되지 않았으며, 토지와 천연자원을 둘러싼 일부 계획은 헌법재판소 판단과 법적 불확실성에도 부딪혔다. 이 사례는 토큰화의 가능성뿐 아니라 국가 자산을 디지털 금융상품으로 전환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법적·정치적 충돌까지 보여준다.
이 흐름을 단순히 “자연을 사고판다”며 비난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숲을 보존하는 것보다 벌목하는 것이 돈이 되는 상황이라면 보전에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시도다. 토큰화와 디지털 측정 기술을 이용해 생태계 보호에 민간자본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 기후위기와 생물다양성 훼손에 대응하는 데 공공재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가격을 매기는 순간 권리의 문제가 발생한다.
누가 자연의 가치를 측정하는가. 누가 토큰을 발행하는가. 토큰을 가진 투자자와 그 땅에서 살아온 주민 가운데 누가 더 강한 권리를 갖는가. 생태계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시장 가격이 떨어졌을 때 자연보전이라는 공익은 계속 유지되는가.
토큰화가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순간, 이 질문은 환경문제가 아니라 소유권과 권력의 문제가 된다.
인간을 둘러싼 논의에서는 더 정교한 구분이 필요하다.
사회적 성과에 자본을 투자하고 결과에 따라 수익을 지급하는 사회성과연계채권(SIB), 교육·건강·생산성을 지표화하는 인적자본 평가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이를 곧바로 ‘인간의 토큰화’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사회적 성과의 금융화와 블록체인 토큰화는 다른 개념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 자체가 토큰이 되고 있느냐가 아니다.
신원, 자산, 거래, 생체정보, 행동 데이터가 점점 하나의 디지털 인프라 안에서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블록체인은 그 자체로 감시 기술도, 해방 기술도 아니다. 그러나 퍼블릭 블록체인의 거래내역은 기본적으로 공개된다. 주소에는 이름이 적혀 있지 않지만 거래소의 고객확인정보(KYC)나 다른 데이터와 연결되는 순간 특정 개인의 자금 흐름을 상당 부분 추적할 수 있다.
한번 기록된 거래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블록체인의 장점은 반대편에서 보면 강력한 추적 가능성이기도 하다.
디지털 화폐의 프로그래머빌리티 역시 마찬가지다.
스마트컨트랙트를 이용하면 특정 조건이 충족됐을 때 자동으로 돈을 지급하도록 할 수 있다. 효율적이다. 공급망 금융, 보조금 지급, 증권 결제 등에서는 상당한 혁신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조건부 결제’와 ‘화폐 자체의 사용처를 통제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유럽중앙은행(ECB)은 디지털유로에서 배달 완료나 계약조건 달성 등에 따른 조건부 결제는 지원할 수 있지만, 사용 장소·기간·상대방을 화폐 발행자가 제한하는 이른바 ‘프로그래머블 머니’는 도입하지 않겠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 차이가 중요하다.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과 제도적으로 허용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인도주의 분야에서도 기술을 무조건 감시 수단으로만 볼 수 없다. 세계식량계획(WFP)의 ‘Building Blocks’는 블록체인을 이용해 여러 구호기관의 지원 중복을 줄이는 시스템이다. WFP는 이름·생년월일·생체정보 같은 민감정보를 해당 블록체인에 저장하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유엔난민기구(UNHCR)가 우크라이나 피란민에게 USDC를 디지털 지갑으로 지급한 사례도 있다. 그러나 지급된 자금은 수취인이 현금으로 바꾸거나 개인 계좌로 이전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이를 ‘사용처를 통제하는 디지털 화폐’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토큰화를 둘러싼 논쟁은 음모론과 기술낙관론 모두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든 토큰화를 소수 엘리트가 세계를 통제하기 위한 프로젝트라고 설명하면 현실을 왜곡한다. 반대로 블록체인이 탈중앙 기술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확대한다고 믿는 것도 순진하다.
기술은 권력을 없애지 않는다.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바꿀 뿐이다.
분산원장이 있어도 토큰 발행 권한이 한곳에 집중될 수 있다. 스마트컨트랙트가 있어도 코드 변경 권한을 소수가 가질 수 있다. 디지털 지갑을 개인이 가지고 있어도 자산 동결이나 접근 차단 권한이 중앙의 사업자에게 남아 있을 수 있다.
겉으로는 분산돼 있어도 실제 권력은 더 집중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토큰화의 진짜 쟁점은 기술이 아니라 거버넌스다.
누가 토큰을 발행하는가.
누가 자산을 동결할 수 있는가.
누가 거래내역을 볼 수 있는가.
누가 스마트컨트랙트의 조건을 바꿀 수 있는가.
데이터의 소유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시스템의 결정에 시민과 이용자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은 토큰화는 혁신이라 부르기 어렵다.
한국도 더 이상 이 논쟁의 바깥에 있지 않다.
토큰증권 제도화를 위한 전자증권법·자본시장법 개정안은 2026년 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분산원장을 증권 계좌부로 인정하고 투자계약증권의 유통을 허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금융위원회는 법 시행에 맞춰 토큰증권 인프라와 발행·유통 제도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은행도 ‘프로젝트 한강’을 통해 예금토큰 등 새로운 디지털 지급수단에 대한 실증을 진행하고 있다. 2026년에는 2단계 사업이 본격 추진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 한국이 물어야 할 질문도 “토큰화를 허용할 것인가”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어떤 자산까지 토큰화할 것인지, 투자자의 권리는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개인정보는 어디까지 기록할 것인지, 발행자와 플랫폼에 어느 정도의 통제권을 허용할 것인지까지 논의를 확대해야 한다.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암호기술과 데이터 최소수집 원칙도 필요하다. 토큰의 동결·회수·변경 권한은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 자연자산을 금융화한다면 지역공동체와 토지 이용자의 권리, 이익 공유 원칙도 처음부터 계약에 들어가야 한다.
기술의 가능성보다 권리의 경계부터 그어야 한다.
토큰화는 분명 거대한 혁신이 될 수 있다. 자본시장의 비효율을 줄이고, 접근하기 어려웠던 자산을 개방하며, 기존 시장이 가격을 매기지 못했던 가치에 새로운 보상체계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토큰화할 수 있다’는 것이 곧 ‘토큰화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것에 가격을 붙일 수 있다는 것과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도 된다는 것도 같은 말이 아니다.
앞으로 금융과 현실세계의 경계는 더욱 빠르게 무너질 것이다. 자산과 데이터, 신원과 결제 시스템 역시 서로 더 긴밀하게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때 가장 위험한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시민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 권한이 코드 속에 숨어버리는 것이다.
만물이 토큰이 되는 시대라면 우리는 더욱 집요하게 물어야 한다.
누구의 자산인가.
누가 규칙을 만드는가.
누가 통제권을 갖는가.
그리고 결국,
누구를 위한 혁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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