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가상화폐를 퇴직연금 투자 대상에 포함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전통적인 금융 시스템과 디지털 자산 사이의 경계가 더욱 허물어지고 있다. 수조 달러 규모의 은퇴 자산 시장에 가상화폐 접근이 가능해지면서 시장 구조에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현지시간 8월 7일, 미국 백악관은 401(k) 퇴직연금 계좌에 가상화폐를 비롯한 대체 자산을 포함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대해 서명 절차를 마쳤다. 401(k)는 미국 내 주요 퇴직연금 수단으로, 근로자가 세금 유예 혜택을 받으며 자산을 쌓을 수 있는 제도다. 현재 약 9조 달러에 이르는 자금이 이 계좌에 적립돼 있으며, 이는 전체 미국 퇴직연금 시장(약 43조 달러)의 5분의 1 수준으로, 단일 금융 체계로 보면 세계 최대 규모다.
이번 조치는 퇴직연금 투자 지침을 관장하는 미국 노동부의 기존 입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앞서 노동부는 401(k) 운용사가 가상화폐를 투자옵션으로 포함할 경우 '극도의 주의'를 기울이라고 권고해 왔으며, 지난 5월 해당 지침은 철회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노동부에 새로운 지침을 마련하도록 명령함으로써, 가상화폐를 사모펀드·부동산 등 다른 대체 투자 자산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도록 했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그간 높은 변동성과 규제 불확실성을 이유로 가상화폐에 접근하지 않았던 자산운용사와 투자 관리자들의 행보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비트코인 기반 상장지수펀드(ETF)와 같은 구조화 금융 상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이에 수백만 달러 규모의 신규 자금이 유입될 가능성이 커졌다. 가상화폐 전문 자산운용사 갤럭시 디지털의 최고경영자는 "401(k)는 막대한 유동성이 저장된 통로"라며 "가상화폐 시장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점점 확대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시장 반응도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트럼프 대통령의 서명 소식이 알려진 뒤, 대표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은 24시간 전보다 2.10% 상승한 11만7천595달러에 거래되며 이달 들어 처음으로 11만7천 달러대를 돌파했다. 이더리움은 5.67% 오른 3천904달러로 4천 달러선 진입을 눈앞에 뒀고, 엑스알피(리플)는 9.56% 급등하면서 3달러선을 회복했다. 솔라나와 도지코인 등 다른 주요 종목도 동반 상승세를 보였다.
이번 행정명령은 단순한 규제 완화에 그치지 않고, 디지털 자산이 기존 금융 질서 내에서 제도권 투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시그널로 해석된다. 가상화폐에 대한 제도적 신뢰가 높아짐에 따라, 향후 글로벌 연금 펀드나 기관 투자자의 유입도 활발해질 가능성이 있다. 다만 변동성 통제와 투자자 보호 장치가 병행되지 않으면 시장 과열 및 리스크 외부화에 대한 우려도 커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