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추론 확산이 낸드플래시 수요의 성격을 바꾸고 있다. 그래픽처리장치(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에 집중됐던 AI 인프라 논의가 대용량 저장장치와 고성능 낸드로 넓어지는 흐름이다.
샌디스크(Sandisk·$SNDK)는 2026년 투자자의 날에서 2028~2030회계연도 매출이 연평균 중하위 두 자릿수 비율로 성장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 회사는 같은 기간 비일반회계기준 매출총이익률 약 80%, 영업이익률 약 75%도 목표로 내놨다.
샌디스크가 공개한 장기 계약 규모는 939억 달러(약 133조원)에 이른다. 계약은 복수의 장기 고객 계약으로 체결된 것으로 전해졌으며, 낸드 업황의 단기 가격 변동성을 낮추기 위한 수요 가시성 확보 장치로 풀이된다.
핵심은 AI 훈련에서 AI 추론으로 무게가 옮겨갈 때 저장장치의 역할이 커진다는 점이다. 훈련은 대규모 모델을 만드는 과정이고, 추론은 완성된 모델이 실제 사용자 요청에 답하는 과정이다.
추론이 늘면 모델 파라미터, 임베딩, 캐시 데이터, 사용자 문맥, 이미지·영상 같은 멀티모달 데이터가 반복적으로 읽힌다. 모든 데이터를 HBM에 올리기 어렵기 때문에 비용 대비 용량이 큰 낸드가 AI 시스템 안에서 더 가까운 저장 계층으로 들어올 여지가 생긴다.
샌디스크가 앞세운 기술은 고대역폭 플래시(HBF)다. 샌디스크는 HBF를 HBM을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라 AI 추론용 메모리를 보완하는 낸드 기반 아키텍처로 설명했다.
회사는 HBF가 HBM과 비슷한 대역폭을 목표로 하면서 약 8배 용량을 제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샌디스크와 SK하이닉스는 2026년 2월 오픈컴퓨트프로젝트(OCP) 아래 HBF 표준화 작업을 시작했다.
오픈컴퓨트프로젝트는 데이터센터 하드웨어와 인프라 표준을 논의하는 개방형 협의체다. HBF가 표준화 논의에 들어갔다는 것은 특정 업체의 단일 제품을 넘어 서버와 가속기 생태계 안에서 채택 가능성을 검토하는 단계로 볼 수 있다.
국내 반도체 업체와도 맞닿아 있다. SK하이닉스는 HBM 시장의 핵심 공급사이면서 HBF 표준화 논의에도 이름을 올렸다.
삼성전자는 앞서 400단 이상 BV-NAND 원형과 zHBM 개념을 공개하며 AI 시스템의 메모리·스토리지 병목을 줄이는 방향을 제시했다. BV-NAND는 웨이퍼 본딩을 통해 저장 밀도와 입출력 성능을 함께 높이는 구조다.
낸드 산업의 변화는 샌디스크만의 흐름은 아니다. 본지는 앞서 샌디스크가 939억 달러 규모 AI 저장 계약을 체결했다는 보도를 전하며 HBF가 AI 추론용 대용량·고대역폭 저장 수요를 겨냥한 기술이라고 보도했다.
다만 AI가 낸드의 주기성을 없앤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낸드는 설비투자와 공급 조절에 민감한 산업이다. 수요가 늘어도 공급 능력이 한꺼번에 확대되면 가격과 마진은 다시 흔들릴 수 있다.
장기 계약은 수요 가시성을 높이지만, 계약 조건과 실제 매출 반영 시점은 계속 확인해야 한다. 특히 장기 계약이 생산능력 투자로 이어질 경우 수요 증가와 공급 확대 사이의 균형이 다시 업황을 좌우할 수 있다.
기존 낸드 기술의 변화도 변수다. 샌디스크는 2026년 7월 BiCS10 1Tb TLC 3D 낸드 샘플링을 발표하면서 BiCS8 대비 비트 밀도가 59% 개선됐다고 밝혔다.
고대역폭 신기술이 아직 초기 단계인 만큼, 단기적으로는 고용량 엔터프라이즈 SSD와 QLC·TLC 낸드 개선이 AI 저장 수요에 먼저 연결될 수 있다. 샌디스크의 전략은 낸드를 단순 저장장치에서 AI 추론 인프라의 용량 계층으로 옮기려는 시도다.
한국 투자자에게 중요한 지점은 주가 방향이 아니라 AI 데이터센터가 메모리 대역폭뿐 아니라 저장 용량을 얼마나 요구하는지다. 그 영향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낸드 장비·소재 공급망의 실제 수주와 설비투자 계획에서 확인될 사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