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증시를 뒤흔든 것은 단순한 주가 하락이 아니었다. 빚으로 주식을 산 개인 투자자들의 계좌가 한꺼번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해외 투자은행 트레이딩 데스크 자료에 따르면 지난 13일까지 국내 레버리지 투자 계좌 120만개 이상에서 추가 담보 납부 요구, 이른바 ‘마진콜’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됐다. 이 가운데 약 32만~36만개 계좌는 증권사에 의해 강제 청산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의 15~64세 인구가 약 3570만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단순 계산으로는 성인 30명 중 1명꼴로 마진콜을 받은 셈이다.
물론 이 수치를 그대로 투자자 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이 여러 증권사 계좌를 보유할 수 있고, 금융당국이 공식 발표한 통계도 아니다. 그러나 최근 한국 증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빚투 청산’의 규모가 평범한 조정 수준을 넘어섰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코스피는 16일 6.4% 폭락했다. 장중 매도 물량이 쏟아지면서 코스피와 코스닥 시장에서는 매도 사이드카가 발동됐다. 삼성전자는 8.8%, SK하이닉스는 11.5% 급락했다. 외국인과 기관이 내놓은 반도체 주식을 개인 투자자들이 대거 받아냈지만, 시장의 하락을 막지는 못했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이 방아쇠를 당겼다면, 주가 급락을 증폭시킨 화약은 신용거래와 레버리지 상품이었다.

120만 계좌에 울린 마진콜
마진콜은 빚을 내 투자한 주식의 가격이 떨어져 담보 가치가 기준 이하로 내려갔을 때 발생한다. 투자자는 정해진 기간 안에 현금이나 추가 주식을 넣어 담보 비율을 회복해야 한다.
이를 채우지 못하면 증권사는 투자자의 동의를 기다리지 않고 주식을 시장에 내다 판다. 이것이 반대매매 또는 강제 청산이다.
상승장에서는 빚이 수익을 키운다. 그러나 시장이 꺾이면 빚은 손실뿐 아니라 매도 속도까지 키운다. 주가 하락이 마진콜을 부르고, 마진콜이 강제 매도를 낳고, 강제 매도가 다시 주가를 끌어내리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이번 코스피 급락에서 나타난 것도 바로 이 구조다.
개인 투자자들은 그동안 외국인이 매도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식을 적극적으로 사들였다. 반도체와 AI 호황이 계속될 것이라는 기대가 강했고, 신용융자와 레버리지 ETF를 이용해 투자 규모를 키운 투자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주가가 급락하자 이들의 계좌는 가장 먼저 담보 부족에 빠졌다. ‘저가 매수’라고 생각했던 투자가 하루 만에 추가 담보 요구와 강제 청산으로 돌아온 것이다.
코스피 6.4% 폭락… 반도체주가 무너졌다
이날 코스피 폭락의 중심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있었다.
삼성전자는 8.8%, SK하이닉스는 11.5% 떨어졌다. 두 종목은 코스피 시가총액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 동시에 무너지면 지수 전체도 버티기 어렵다.
올해 들어 삼성전자 주가는 두 배 이상, SK하이닉스는 세 배 가까이 뛰었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와 고대역폭메모리 수요 증가가 주가 상승을 이끌었다.
문제는 주가가 실적보다 훨씬 빠르게 올랐고, 그 위에 대규모 신용거래와 레버리지 투자가 쌓였다는 점이다.
반도체 업황이 하루아침에 나빠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좋은 산업 전망이 어떤 가격에서도 주식을 사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주가가 너무 빠르게 오르면 작은 악재에도 투자자들이 한꺼번에 출구로 몰릴 수 있다.
금리 인상이 ‘빚투’의 약한 고리를 건드렸다
직접적인 충격은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이었다.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연 2.50%에서 2.75%로 0.25%포인트 올렸다. 3년여 만의 첫 금리 인상이다.

금리를 올린 배경에는 원화 약세와 물가 상승, 서울을 중심으로 한 부동산 가격 상승, 가계부채 확대가 있다. AI 반도체 수출 호황이 임금과 성과급, 소비 증가로 이어져 물가 압력을 더 오래 끌고 갈 수 있다는 우려도 반영됐다.
금리 인상은 빚을 내 투자한 사람에게 가장 먼저 부담이 된다. 이자 비용이 높아지고, 증권사의 신용거래 조건도 까다로워질 수 있다. 특히 이미 높은 가격에 주식을 산 투자자에게는 작은 주가 하락도 치명적이다.
금리 인상이 코스피 폭락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다만 과도하게 쌓인 레버리지의 약한 고리를 끊어놓은 계기는 됐다.
금융당국,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에 급제동
금융당국도 뒤늦게 긴급 대책을 꺼냈다.
금융위원회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개별 종목의 하루 수익률을 두 배로 추종하는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의 신규 상장을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 증권사와 자산운용사의 광고와 마케팅도 제한한다.
신규 투자자의 기본예탁금은 1000만원에서 3000만원으로 세 배 높인다. 투자자가 일정 수준의 현금을 보유해야 거래할 수 있도록 진입 장벽을 높인 것이다.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품은 기초 주식이 하루 10% 오르면 약 20%의 수익을 내도록 설계된다. 반대로 기초 주식이 10% 떨어지면 손실도 약 20%로 커진다.
상승장에서는 수익률을 빠르게 높이지만, 하락장에서는 손실과 매도 압력을 동시에 확대한다. 상품 운용사가 매일 목표 배율을 맞추기 위해 주식을 사고파는 과정도 시장의 변동성을 키울 수 있다.
당국은 투기 거래를 줄이고 시장을 안정시키겠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이미 수많은 개인 계좌가 마진콜과 강제 청산을 겪은 뒤에야 규제가 나왔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외국인이 팔고 개인이 샀다
이번 급락에서도 익숙한 장면이 반복됐다.
외국인과 기관은 대형 반도체주를 대거 팔았고, 개인은 이를 받아냈다. 개인 투자자들은 주가가 충분히 떨어졌다고 판단해 저가 매수에 나섰다.

그러나 신용과 레버리지를 이용한 매수는 현금 투자와 다르다. 주가가 더 떨어질 경우 기다릴 시간이 없다. 증권사가 정한 담보 기준을 지키지 못하면 투자자의 장기 전망과 관계없이 주식이 강제로 팔린다.
개인이 외국인의 매물을 받아낼 때는 시장의 버팀목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자금이 빚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시장이 한 번 더 하락할 경우 오늘의 매수자가 내일의 강제 매도자가 될 수 있다.
‘30명 중 1명’이 보여주는 것
‘한국 성인 30명 중 1명 마진콜’이라는 표현은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120만개는 계좌 수이지 반드시 120만명의 투자자를 뜻하지 않는다. 동일한 투자자가 여러 계좌를 보유했을 가능성도 있다. 해당 수치 역시 금융당국이나 금융투자협회가 공식 확인한 통계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 추산이 시장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국 증시의 상승이 기업 실적과 외국인 자금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 투자자의 신용과 레버리지에 크게 의존했다는 사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120만 계좌에서 추가 담보 요구가 발생했다면, 이번 조정은 일부 고위험 투자자의 실패에 그치지 않는다. 가계 소비와 자산시장 심리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대규모 디레버리징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
주식 손실이 커지면 개인은 소비를 줄이고 다른 자산을 팔아 현금을 마련한다. 부동산과 디지털자산 등 다른 위험자산 시장으로 충격이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도체의 위기가 아니라 가격과 빚의 위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쟁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AI 반도체와 메모리 수요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좋은 기업도 너무 비싼 가격에 사면 나쁜 투자가 될 수 있다. 여기에 빚까지 더해지면 작은 조정도 치명적인 손실로 바뀐다.
이번 코스피 폭락의 본질은 반도체 산업의 붕괴라기보다, 반도체 호황을 믿고 쌓아 올린 가격과 레버리지가 동시에 무너진 데 있다.
한국 성인 30명 중 1명꼴로 마진콜을 받았다는 추산이 정확한 사람 수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증시가 얼마나 많은 빚 위에 올라서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경고음으로는 충분하다.
레버리지는 상승장에서는 시간을 앞당겨준다. 하락장에서는 파산을 앞당긴다.
금융당국은 이제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나 수십만개의 계좌는 이미 절벽 아래로 밀려난 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