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정부정책과학위원회(WRR)는 미중 갈등과 중국발 저가 수출 압박을 기존 자유무역 질서 안에서만 다루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반도체와 정보기술 수출 비중이 큰 한국 경제에도 공급망 재편과 무역 방어 논의가 이어질 수 있는 사안이다.
네덜란드 정부정책과학위원회(WRR)는 8월 27일 공개한 ‘Europe in the Era of Geoeconomics: Rebalancing Trade, Boosting Innovation’ 보고서에서 “The world as we knew it no longer exists”라고 밝혔다. WRR는 중국과 미국이 경제력을 지정학적 무기로 쓰는 상황에서 유럽연합(EU)이 핵심 기술과 공급망에서 두 나라에 의존하고 있다고 봤다.
보고서의 초점은 ‘세계의 종말’이 아니라 정책 전제의 붕괴다. WRR는 전후 자유무역 질서만을 기준으로 산업정책을 짜면 유럽의 핵심 의존도를 낮추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지경학은 관세, 보조금, 수출통제, 투자심사처럼 경제 수단이 외교·안보 목적과 결합하는 흐름을 뜻한다. 지금까지 유럽의 통상정책은 개방성과 경쟁을 큰 축으로 삼아 왔지만, WRR는 이 틀만으로는 핵심 기술 의존과 공급망 취약성을 줄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WRR 보도자료는 중국산 제품이 유럽산보다 30% 이상 저렴한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보고서는 중국 기업의 산업 보조금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3~8배 높고, 위안화가 12%에서 30% 이상 저평가돼 있다고 적었다.
낮은 임금, 대규모 보조금, 환율 요인이 결합하면서 유럽 기업의 경쟁 여건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WRR는 혁신정책만 강화해서는 중국과의 가격 격차를 메우기 어렵다는 판단도 함께 제시했다.
WRR는 대응 방향으로 혁신정책과 무역정책의 동시 조정을 제안했다. 보고서에는 국제공조, 전략적 대칭, 더 강한 무역방어 수단이 가능한 경로로 제시됐다.
WRR는 무역 불균형을 다루기 위해 “all options need to be on the table”이라고 적었다. 관세, 보조금, 투자규제 같은 수단이 논의 테이블에 오를 수 있다는 뜻이다.
라보뱅크(Rabobank)도 같은 문제의식을 시장 관점에서 다뤘다. 라보뱅크는 7월 1일 리포트에서 올해 상반기 금융시장을 움직인 두 축으로 ‘기술·AI’와 ‘지정학적 위험’을 꼽고, 시장이 충격을 흡수해 왔지만 오차를 감당할 여지는 줄고 있다고 밝혔다.
라보뱅크는 8월 11일 메모에서 해운 항로 불안과 운송비 상승이 독일 산업과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을 압박한다고 분석했다. 전략적 자율성은 핵심 기술과 공급망을 외부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으려는 정책 방향이다.
미국도 중국의 수출 의존 구조를 압박하고 있다. 로이터(Reuters)는 스콧 베센트(Scott Bessent) 미국 재무장관이 8월 30일 G20 회원국에 중국과의 교역 조건을 다시 살펴보라고 촉구했다고 보도했다.
베센트는 중국의 수출 흐름이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중국이 내수 중심으로 경제 구조를 재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WRR 보고서와 미국 측 발언은 모두 중국의 저가 수출과 공급망 의존을 통상 현안이자 안보 현안으로 다루는 흐름에 놓여 있다.
산업계도 WRR 보고서에 반응했다. 네덜란드 경제단체 VNO-NCW는 8월 28일 입장문에서 WRR가 강한 혁신·산업정책과 새 무역정책의 결합을 요구했다며 이를 지지했다.
VNO-NCW는 투자 여건, 재원, 거버넌스를 함께 손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보고서 자체가 곧바로 집행되는 규제는 아니며, 유럽이 실제로 어떤 관세, 보조금, 투자규제 수단을 선택할지는 추가 결정이 필요하다.
국내 독자에게 이 논의는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행도 IT 제조업 비중 확대를 한국 경제 성장 기회로 평가한 바 있다. 반도체와 AI 관련 수출이 성장 흐름을 떠받치는 구조일수록 미중 무역 갈등, 유럽의 무역방어 강화, 중국발 가격 압박은 기업 실적과 공급망 전략에 영향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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