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절대 강자 테더(Tether)가 드디어 미국 규제권에 발을 디뎠다. 9월 12일 뉴욕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테더는 미국 기업과 기관을 위해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USA₮(USAT)를 2025년 말 출시한다고 발표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미국에서 은행 면허를 취득한 앵커리지 디지털 뱅크(Anchorage Digital Bank)가 발행을 맡고, 월가 중견 증권사 캔터 피츠제럴드(Cantor Fitzgerald)가 준비금 보관기관 및 미 재무부 선매입 딜러 역할을 수행한다. 테더는 이미 세계 최대 스테이블코인인 USDT를 통해 약 1700억 달러 규모의 시장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제 USAT 출시로 미국 내 시장까지 진출하며 규제에 정면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이 선택의 배경에는 지난 7월 발효된 GENIUS Act가 있다. 이 법은 미국에서 ‘허가된 결제 스테이블코인’이 되려면 100% 준비금을 현금 및 단기 국채로 보유하고 월별 공개 보고를 의무화한다. 또한 발행사는 이자 지급을 금지하고, 연방암호화폐 감독법(BSA)에 따라 자금세탁방지(AML)·제재 준수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 테더의 기존 스테이블코인 USDT는 해외법인 중심으로 발행돼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GENIUS Act에 맞춘 별도의 미국용 스테이블코인을 설계한 것이다. 발행사는 앵커리지 디지털로 등록되고, 준비금은 캔터 피츠제럴드가 보관한다는 구조로 규제 당국의 승인 가능성을 높였다.
테더 공동 창업자이자 CEO인 파올로 아르도이노(Paolo Ardoino)는 “USAT 출시를 통해 디지털 달러 인프라를 더욱 투명하고 회복력 있게 만들고, 세계적 금융거래의 핵심 동력이 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테더가 2024년 130억 달러 이상의 순이익을 올렸고, 미국 국채 보유 규모가 1,270억 달러에 달해 세계 18위 규모로 한국과 호주보다 많은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국채의 주요 보유자가 된 테더가 미국 내에서 공신력을 얻고자 하는 맥락이 읽힌다.
경쟁 구도: 테더 vs 서클, 수익성과 시장점유율
이번 행보는 미국 규제권을 장악한 서클(Circle)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서클의 USDC는 GENIUS Act에 맞춰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유통되고 있으며, 2024년 기준 1억 6,800만 달러의 매출과 1억 5,600만 달러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그러나 테더는 같은 해 순이익이 130억 달러에 달해 서클 대비 80배 이상의 이익을 창출했다. USDT는 이미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약 70%를 점유하고 있으며, 테더의 회계 규모와 트레저리 보유액을 감안하면 ‘규제에 준수한 테더’라는 브랜드가 미국 시장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테더가 보 하인스(Bo Hines)를 테더 USAT의 CEO로 임명한 것이다. 그는 백악관 디지털자산 전담 고문을 지낸 경력이 있어 미국 행정당국과의 연결점이 강하다. 법률 준수와 로비를 위한 강력한 사령탑을 세웠다는 의미다.
생태계 영향: 블록체인 네트워크와 유동성
USDT는 현재 총 공급량의 약 78%가 이더리움과 트론 네트워크에 발행돼 있다. USAT도 같은 체인에 도입될 경우, 두 체인의 결제·거래 인프라 강화가 예상된다. 이는 블록체인 기반 결제 생태계의 안정성을 높여줄 수 있지만, USDT와 USAT의 ‘두개의 풀’이 만들어지면서 유동성이 분리될 수 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시장 메이커와 헤지펀드 등 전문 트레이더들이 깊은 유동성과 빠른 전송을 선호하는데, 미국 내 규제 코인과 해외 코인이 별도로 존재하면 브릿지나 교차거래 비용이 발생해 스프레드가 확대될 수 있다. 즉, “커피 결제용 코인”이 아니라 거래 인프라라는 본질에서 보면 유동성 단일화가 핵심이라는 비판이다.
테더 측은 USDT와 USAT가 서로 상호보완적이라고 주장한다. 아르도이노는 “USDT와 USAT는 서로 이득을 주고받으며 세계 금융거래의 척추가 될 것”이라고 말했고, 하인스는 “해외 송금이 달러 채택의 부트스트랩이며, 미국 노동자들이 USAT를 해외로 송금할 때 그 ‘점착력’으로 달러가 더 강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USAT는 미국 규제에 따라 예금자 보호와 AML·제재 준수가 강화되므로, 미국 은행 및 기관이 적극적으로 도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장기적으로 USDT와 USAT를 하나의 스테이블코인으로 통합해야만 깊은 유동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향후 과제: 달러 인프라의 주도권과 규제 컨센서스
이번 출시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새로운 코인이 추가된 것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 ‘달러의 레일’을 누가 통제할 것인가에 대한 주도권 싸움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한 GENIUS Act는 스테이블코인이 미국 국채 수요를 촉진하는 동시에, 연방은행 시스템과 결합해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테더는 이 법을 수용하면서 기존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사업과 미국 시장을 연결하고, 서클과의 경쟁 속에서 규제 준수·투명성·이익 규모라는 세 가지 무기로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려 한다.
그러나 두 개의 테더 코인이 공존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유동성 단편화 문제는 심화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USDT와 USAT를 단일 국제 표준으로 통합하거나, 각국 규제에 따라 여러 버전을 발행하되 상호 변환 비용을 최소화하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시장은 테더가 통합의 길을 택할지, 달러를 두 개로 나눌지 주목하고 있다. 미국의 규제 환경이 진화하고 경쟁사인 서클의 전략이 어떻게 변할지에 따라 결론은 달라질 수 있다.
합쳐질까, 갈라설까
테더의 USAT 출시는 미국 규제권 안에서 스테이블코인 산업의 지형을 바꿀 중대한 사건이다. GENIUS Act의 엄격한 요구를 수용한 테더는 준비금 공개와 규제 준수라는 신뢰 자본을 얻는 대신, 두 개의 코인을 운영하는 복잡성을 떠안았다. 규제와 혁신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취할지, 그리고 테더 vs 서클의 경쟁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향후 중요 변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디지털 달러를 둘러싼 경쟁이 이제 막 시작됐으며, 플레이어들은 더이상 규제의 ‘음지’를 찾지 않고, “게임의 규칙 안에서 판을 키우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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