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1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지니어스법(GENIUS Act)에 서명했다.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최초의 포괄적 연방 규제 프레임워크다. 법안의 내용보다 그 장면이 말해주는 것이 있다. 미국은 스테이블코인을 금융 혁신 실험으로 보지 않는다. 국가 전략으로 본다.
달러는 이미 블록체인을 탔다. 원화는 아직 항구에 있다.
화폐는 언제나 외교였다
로마가 속주에 데나리우스 은화를 유통시킨 것은 군단보다 오래 작동하는 지배 수단이었다. 19세기 영국이 파운드화를 기축으로 삼은 것은 함선의 힘만큼이나 신용의 힘이었다. 1944년 브레턴우즈에서 달러가 금과 등가를 선언했을 때, 미국은 전장이 아닌 협상 테이블에서 패권을 확보했다.
그리고 지금, 그 판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이번에는 블록체인 위에서.
테더(USDT)와 서클(USDC)은 이미 전 세계 거래량 기준으로 비자(Visa)와 마스터카드를 합산한 수준을 넘어섰다. 2025년 기준 스테이블코인은 전체 온체인 거래량의 30%를 차지하며, 연간 4조 달러를 돌파했다. 전년 동기 대비 83% 증가한 수치다. 아르헨티나 국민은 페소 인플레이션을 피해 USDT를 생활 통화로 쓴다. 나이지리아 한 나라만으로 12개월간 920억 달러 이상의 크립토 거래가 발생했다. 아프리카 전체에서 크립토 활성 이용자의 79%가 스테이블코인을 보유한다. 이들이 보유한 것은 거의 전부 달러 스테이블코인이다.
이것이 스테이블코인 외교다. 군사력도, 외교관도, 조약도 필요 없다. 코드가 국경을 넘고, 지갑이 열릴 때마다 통화 권력이 이동한다.
동쪽에서도 움직임이 있다
서쪽에서 달러가 블록체인을 타는 동안, 동쪽에서는 위안이 다른 경로로 움직인다. 이란은 호르무즈해협 통행 조건으로 위안화 결제를 요구한다. 중국의 e-CNY(디지털 위안)는 일대일로 결제망과 연결되며 중동·동남아 무역 거래에 조용히 침투 중이다. 러시아의 제재 회피 거래는 이미 대안 통화 경로로 이동했다.
달러와 위안이 동시에 손을 내밀고 있는 곳 —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 — 이 전장에서 어느 나라의 스테이블코인이 먼저 뿌리를 내리느냐가 향후 10년의 통화 질서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 전장은 한국의 무역·수출·한류 경제권과 정확히 겹친다.
막는다고 달러가 물러서지 않는다
한국은행 차기 총재 후보 신현송 BIS 통화경제국장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에 대해 일관된 신중론을 견지해왔다. 외환 규제 무력화, 자본 유출 통로, 화폐 단일성 훼손 — 그 논거는 학술적으로 근거가 있다. 그러나 이 논리를 끝까지 밀면 도달하는 결론은 하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이미 하나의 선택이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에 원화의 디지털 공간을 내어주는 선택.
테더는 이미 국내 가상자산 거래량 상위권에 진입했다. 한국 투자자들이 원화를 테더로 환전하고, 테더로 글로벌 DeFi에 접속하고, 테더로 해외 자산을 매입하는 흐름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법제화 여부와 무관하게 진행 중이다. 규제의 공백은 달러가 채운다. 이것이 스테이블코인 외교의 냉혹한 물리학이다.
CBDC만으론 이 전쟁을 싸울 수 없다
한국은행의 프로젝트 한강은 CBDC 기반 예금토큰 실험이다. 9개 은행이 참여하고, 국고금 블록체인 집행과 디지털 바우처 결제를 시험한다. 방향은 옳다. 그러나 CBDC의 구조적 한계가 있다.
CBDC는 허가된 네트워크 안에서만 흐른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싱가포르 거래소, 아부다비 결제망, 나이지리아 개인 지갑에 동시에 접근할 때, CBDC는 국내 은행 시스템 안에 머문다. 정규군은 강하지만, 게릴라전에는 느리다. 스테이블코인은 민병대다. 제대로 편성하면 정규군이 닿지 못하는 곳까지 원화의 깃발을 꽂을 수 있다.
싱가포르는 이 문제를 이중 트랙으로 풀었다. 엄격한 준비자산·감사 의무 아래 민간 스테이블코인을 허용하면서, 도매 CBDC 실험을 별도 레인으로 병행한다. 일본은 2023년 개정 자금결제법으로 엔화 스테이블코인을 허용했다. 은행 중심 발행 구조를 갖추되 혁신 여지를 남겼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CBDC와 스테이블코인을 대립이 아닌 이중 레이어로 설계했다는 것.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길
본지는 한국이 택해야 할 경로를 이렇게 본다.
레이어 1은 한강 CBDC다. 한국은행이 주도하는 도매 CBDC와 예금토큰 인프라. 국고금 집행, 정부 바우처, 은행 간 결제. 중앙은행이 비타협적으로 통제하는 영역이다. 신뢰의 닻이다.
레이어 2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이다. 은행 컨소시엄 중심으로 허용하되, 준비자산 100% 법제화·월별 독립 감사·외환 보고 의무를 부과한다. 글로벌 DeFi 연동, 아시아 무역 결제, 해외 한인 송금에서 원화의 디지털 판로를 연다. 감독은 강하게, 혁신은 열어둔다.
결정적 설계 포인트는 두 레이어의 기술적 연결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준비자산을 예금토큰 형태로 예치하도록 의무화하면, 자본 흐름 추적이 가능해지고 외환 무력화 우려가 구조적으로 차단된다. 신 후보자가 우려하는 문제의 해법이 규제 금지가 아니라 기술 아키텍처에 있다는 뜻이다.
항구를 떠날 시간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통화 패권의 전환점에서 늦게 결정한 나라는 항상 대가를 치렀다. 브레턴우즈를 설계할 때 영국은 케인스를 보냈지만 달러가 이겼다. 유럽이 유로화 출범을 10년 늦췄다면, 달러 의존은 지금보다 훨씬 깊었을 것이다.
지금 스테이블코인 외교의 판도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이 창이 닫히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원화 없는 디지털 실크로드 위에서, 한국 기업이 베트남 파트너에게 결제할 때, 인도네시아 소비자가 K-콘텐츠를 살 때, 중동 건설 현장에서 한국 하청업체가 대금을 받을 때 — 그 경로는 전부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통과한다. 원화가 보이지 않는 것은 원화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원화의 디지털 판로가 없기 때문이다.
달러는 이미 블록체인을 탔다. 원화가 항구를 떠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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