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설계할 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블록체인 위에 올려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캐나다 중앙은행(Bank of Canada) 연구진이 이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는 논문을 2026년 5월 발표했다. 조너선 치우(Jonathan Chiu), 올리버 쉬(Oliver Xu), 시릴 모네(Cyril Monnet) 세 경제학자가 공동 집필한 이 연구는 단순한 기술 선택을 넘어, CBDC 설계가 스테이블코인·은행 대출·담보 자산 배분이라는 금융 시스템 전반에 어떤 파급을 미치는지 일반균형 모형으로 분석한다.
한국이 CBDC 파일럿 테스트를 진행 중이고, 토큰증권(STO) 시장이 개화하고 있는 지금, 이 논문의 핵심 결론은 한국 정책 당국과 금융권 모두에 직접적인 시사점을 준다.
CBDC의 두 가지 얼굴
먼저 개념 정리가 필요하다.
논문은 CBDC를 두 종류로 나눈다.
비토큰화 CBDC는 기존 은행 예금과 마찬가지로 오프체인(off-chain) 결제에 쓰인다. 현재 한국은행이 검토 중인 소매 CBDC와 유사한 형태다. 스마트폰 앱으로 편의점에서 결제하는 '디지털 현금'을 떠올리면 된다.
토큰화 CBDC는 블록체인 위에서 작동한다. 스마트 계약으로 자동 결제가 이루어지고, DeFi(탈중앙화 금융) 플랫폼의 담보 자산으로도 활용된다. 스테이블코인이 하는 역할을 중앙은행이 직접 수행하는 것이다.
두 형태의 차이는 단순히 기술적이지 않다. 논문의 핵심 주장은 이것이다. 어떤 CBDC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스테이블코인 시장, 은행 대출, 담보 자산 배분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전통 은행과 '크립토 은행'의 공존
논문이 그리는 미래 금융 시스템은 두 세계가 나란히 존재한다.
하나는 우리가 익숙한 전통 금융이다. 시중은행이 예금을 받고, 기업에 대출을 내주며, 국채를 담보로 보유한다. 한국의 KB국민은행, 신한은행 같은 곳이다.
다른 하나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는 '크립토 은행'이다. 테더(USDT), 서클(USDC) 같은 발행사들이 여기 해당한다. 이들은 비트코인·이더리움 같은 암호자산을 담보로 보유하고, 온체인(on-chain)에서 스테이블코인을 유통한다.
논문은 이 두 세계가 같은 담보 자산, 즉 미국 국채를 두고 경쟁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국채가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전통 은행이 더 가져가면 크립토 은행은 덜 가져가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CBDC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이 균형점이 달라진다.
한국 맥락에서 보면 의미가 크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KRWQ 같은 프로젝트가 등장하고, 토큰증권 발행사들이 늘어나면서, 전통 금융과 온체인 금융이 같은 담보 풀을 두고 경쟁하는 구도는 이미 시작됐다.
핵심 결론 1: 토큰화 CBDC는 스테이블코인을 밀어낸다
논문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는 이것이다.
크립토 은행, 즉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의 신뢰성이 낮고 담보로 쓸 암호자산이 부족할 때, 토큰화 CBDC를 발행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이득이다.
왜인가. 토큰화 CBDC가 온체인 시장에 공급되면, 소비자들이 신뢰도가 낮은 민간 스테이블코인 대신 중앙은행이 보증하는 디지털 화폐를 쓰게 된다. 스테이블코인이 밀려나면서 크립토 은행이 쌓아두던 국채가 시장에 풀리고, 전통 은행이 이를 활용해 기업 대출을 늘릴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신뢰하기 어려운 민간 코인이 담보를 독점하고 있던 자리에 중앙은행이 들어오면, 자원 배분이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
한국 적용: 금융당국이 원화 스테이블코인 사업자의 건전성을 아직 충분히 검증하지 못한 상황에서, 한국은행의 토큰화 CBDC가 선제 공급된다면 민간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성장을 억제할 수 있다. 이는 정책 선택의 문제다.
핵심 결론 2: 비토큰화 CBDC는 스테이블코인을 오히려 키울 수 있다
반직관적인 결과가 여기에 있다.
비토큰화 CBDC, 즉 일반 디지털 현금을 발행하면 어떻게 될까. 논문은 상황에 따라 스테이블코인이 오히려 늘어날 수 있다고 분석한다.
메커니즘은 이렇다. 비토큰화 CBDC가 전통 금융 부문에 공급되면, 중앙은행이 국채를 매입해 CBDC 발행을 뒷받침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전통 은행이 보유하던 국채 일부가 중앙은행으로 넘어간다. 전통 은행의 담보가 줄어들면서 예금 공급과 기업 대출이 감소한다.
반면 크립토 은행 쪽에는 상대적으로 담보 여유가 생기고, 이를 바탕으로 스테이블코인 발행이 늘어난다. 중앙은행이 디지털 현금을 만들었더니, 민간 암호화폐가 더 번성하는 역설이다.
단, 이 결과는 전통 은행과 크립토 은행 모두 국채를 보유하고 있을 때 나타난다. 크립토 은행이 국채를 쓰지 않는다면 이런 파급효과는 발생하지 않는다.
핵심 결론 3: 어떤 CBDC가 좋은지는 세 가지에 달려 있다
논문은 최적 CBDC 설계를 결정짓는 세 가지 구조적 요인을 제시한다.
첫째, 담보 자산의 공급이다. 국채, 기업 대출 채권, 암호자산 등 담보로 쓸 수 있는 자산이 얼마나 풍부한가. 담보가 부족할수록 토큰화 CBDC의 효과가 크다.
둘째, 크립토 은행의 신뢰성이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얼마나 규제를 받고, 담보 자산을 투명하게 관리하는가. 신뢰성이 낮을수록 중앙은행이 직접 온체인에 개입할 유인이 커진다.
셋째, 온체인 거래의 사회적 가치다. 블록체인 위에서 이루어지는 거래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유익한가. 범죄 자금 세탁처럼 바람직하지 않은 거래 비중이 높다면, 토큰화 CBDC로 온체인 경제를 키우는 것이 반드시 좋지 않을 수 있다.
이 세 가지 변수의 조합에 따라 정답이 달라진다. 논문의 수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최적 시나리오에서 토큰화 CBDC 도입의 후생 개선 효과는 소비 기준 최대 9%에 달할 수 있다.
"CBDC는 은행 대출을 줄인다" — 빠뜨릴 수 없는 부작용
논문이 강조하는 부작용이 있다. 어떤 형태의 CBDC든, 발행 자체가 은행 대출을 줄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CBDC가 발행되면 중앙은행이 국채를 더 많이 보유해 발행을 뒷받침해야 한다. 민간 은행이 쓸 수 있는 국채가 줄어들고, 이는 예금과 대출 공급 여력을 축소한다.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대출 시장이 위축될 수 있다는 것은 실물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이다. 특히 한국처럼 중소기업이 은행 대출에 크게 의존하는 경제 구조에서 이 부작용은 더 예민하게 다가온다.
논문은 이를 지불 효율성 향상과 은행 대출 축소 사이의 트레이드오프라고 표현한다. CBDC 도입의 득과 실을 동시에 봐야 한다는 경고다.
한국에 주는 시사점 세 가지
첫째, 한국은행의 CBDC 설계 선택이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운명을 결정한다.
토큰화 CBDC를 먼저 내놓으면 민간 원화 스테이블코인 사업의 성장 공간이 좁아진다. 비토큰화 CBDC에 머문다면 민간 스테이블코인이 온체인 시장을 선점할 시간을 벌게 된다. 한국은행의 결정은 단순한 기술 선택이 아니라 시장 구조를 결정하는 정책 선택이다.
둘째,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의 신뢰성 확보가 관건이다.
논문의 논리에 따르면, 민간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충분히 신뢰받고 규제 안에 들어올수록 토큰화 CBDC의 필요성은 줄어든다. 역으로 KRWQ 같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프로젝트들이 투명한 준비금 관리와 규제 준수를 입증한다면, 한국은행이 직접 온체인에 개입해야 할 압박이 낮아진다.
셋째, CBDC와 토큰증권(STO)은 함께 설계해야 한다.
국채가 전통 금융과 온체인 금융 모두의 담보 자산으로 쓰인다면, 한국 시장에서 토큰증권 발행이 늘어날수록 담보 자산 배분 문제가 현실화된다. 한국은행과 금융위원회가 CBDC와 STO 정책을 따로 설계한다면 나중에 충돌이 불가피하다. 지금부터 통합된 시각이 필요하다.
기술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
이 논문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단순하다.
CBDC를 토큰화할지 말지는 기술 팀이 결정할 일이 아니다. 스테이블코인 생태계를 어떻게 키우거나 억제할 것인가, 은행 대출 시장을 얼마나 감수할 것인가, 온체인 경제의 사회적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 세 가지에 대한 정책적 판단이 먼저 서야 한다.
한국은 지금 그 판단을 내려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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