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으로 실제 자산을 거래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끝났다. 답은 '그렇다'다.
블랙록, JP모건, 피델리티 같은 월가의 공룡들이 채권·펀드·단기 국채 같은 실물 자산을 블록체인 위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전 세계 실물자산 토큰화(RWA) 시장은 스테이블코인을 포함해 300억 달러를 넘어섰고, 달러 연동 디지털 화폐인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2026년 5월 현재 3,2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이제 시장이 던지는 질문은 다르다.
"토큰화된 자산을 일반 투자자가 안전하고 편리하게 살 수 있게 만드는 곳은 어디인가."
토큰화가 뭔데, 왜 중요한가
쉽게 말하면 이렇다. 강남 아파트 한 채를 100만 개의 디지털 조각으로 쪼개 누구나 1만 원어치씩 살 수 있게 만드는 기술이 토큰화다. 지금까지는 수십억 원짜리 부동산이나 기관 투자자만 접근할 수 있던 채권·펀드가 대상이었다면, 토큰화는 이 진입 장벽을 낮춘다.
한국에서도 뮤직카우, 갤럭시아머니트리 그리고 각 시중은행들이 토큰증권(STO) 사업을 준비하거나 시범 운영 중이다. 금융당국도 2024년부터 토큰증권 가이드라인을 내놓으며 시장 진입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1단계는 끝났다. "누가 먼저 만드냐" 경쟁
초창기 토큰화 시장은 단순했다. 누가 가장 큰 토큰화 상품을 먼저 내놓느냐의 싸움이었다.
블랙록은 미국 국채와 레포에 투자하는 약 28억5,000만 달러 규모의 토큰화 머니마켓 펀드 'BUIDL'을 출시해 9개 블록체인에서 운용 중이다. JP모건은 기업 간 결제 플랫폼 'Kinexys'를 구축했고, 프랭클린 템플턴의 'BENJI', 위즈덤트리의 'WTGXX' 등도 잇달아 시장에 나왔다.
마치 1990년대 인터넷 쇼핑몰 초창기에 "누가 먼저 물건을 올리냐" 경쟁이 벌어졌던 것과 비슷한 풍경이다.
이 경쟁은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토큰화가 말이 아닌 현실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이제 상품을 만드는 곳은 넘쳐난다. 경쟁의 무게중심이 바뀌고 있다.
"만드는 것보다 파는 게 더 어렵다"
금융의 역사는 같은 교훈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뉴욕증권거래소(NYSE)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금융 기관이 된 것은 기업 주식을 직접 발행해서가 아니다. 전 세계 투자자가 그 주식을 쉽고 안전하게 사고팔 수 있는 시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국 최대 증권사 찰스슈왑(Schwab)이 수천만 고객을 보유한 것도 뮤추얼펀드를 직접 만들어서가 아니다. 다양한 펀드를 한 계좌에서 비교하고 살 수 있게 한 유통 플랫폼 덕분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 주식이 아무리 좋아도 증권사 앱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좋은 펀드가 있어도 판매사가 없으면 투자자에게 닿지 않는다. 결국 '파는 곳'이 시장을 만든다.
토큰화 시장도 이제 같은 단계에 진입했다.

거시 환경도 도와주지 않는 성장
주목할 점은 이 성장이 우호적인 거시 환경 덕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 연준은 2026년 4월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3.50~3.75%로 세 번 연속 동결했다. 중동 사태로 인한 에너지 가격 상승이 인플레이션 재점화 우려를 키우고 있고, 연내 추가 인하 전망도 불투명하다. 전형적인 고금리 장기화 국면이다.
그럼에도 토큰화 자산은 성장하고 있다. 투기적 기대가 아니라, 인프라로서의 실질적 쓸모가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테이블코인이 현금 레이어를 담당하고, 토큰화 국채가 수익 레이어 역할을 하며, 규정 준수 프레임워크가 규칙 레이어로 자리 잡고 있다. 빠진 것은 하나다. 바로 유통(distribution)이다.
지금 투자자가 겪는 현실
현재 토큰화 자산 시장의 문제를 솔직하게 말하면 이렇다.
관심 있는 투자자가 토큰화 자산을 사려면 이런 질문들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 이 토큰은 어떤 자산을 담보로 하는가. 한국 투자자가 살 수 있는가, 아니면 미국 적격 투자자만 가능한가. KYC(본인인증)는 어디서 하는가. 결제는 원화로 되는가,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해야 하는가. 팔고 싶으면 어디서 팔 수 있는가. 세금은 어떻게 신고하는가.
이것은 상품이 나쁜 게 아니다. 이용 환경 자체가 아직 없는 것이다.
쿠팡 이전의 국내 인터넷 쇼핑몰처럼, 물건은 있는데 결제·배송·반품이 제각각인 상태다. 지금의 RWA 시장이 딱 그 모습이다.
스테이블코인이 '온라인 계좌이체'가 된다
이 구도에서 스테이블코인의 역할이 핵심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와 1:1로 연동된 디지털 달러다. 2026년 5월 현재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3,200억 달러를 돌파했고, 테더(USDT)가 시장의 약 60%를 점유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정식 금융 규제 안으로 편입하는 'GENIUS Act'가 2025년 7월 발효됐고, OCC(통화감독청)는 이행 규정안을 발표해 5월 1일 공개 의견 수렴을 마쳤다. 유럽은 7월 1일부터 MiCA(암호자산시장 규정)가 본격 시행된다.
스테이블코인이 제도권에 완전히 편입되면, 토큰화 자산의 매매와 결제가 지금의 계좌이체만큼 간단해진다. 그때 진짜 유통이 시작된다.
미국 국채가 '1호 상품'이 된 이유
지금까지 토큰화 시장에서 가장 성공한 상품은 미국 국채다. 2026년 5월 현재 토큰화 미국 국채 시장은 약 130억 달러 규모로, 이 중 이더리움 기반만 80억 달러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블랙록 BUIDL이 약 26억 달러로 1위, 온도 파이낸스 USDY가 21억 달러로 2위, 프랭클린 템플턴 iBENJI가 21억 달러로 그 뒤를 잇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 국채는 가장 안전하고 익숙한 자산이다. 연 4~5%대 수익률을 제공하면서도 원금 손실 위험이 거의 없다. 고금리 시대에 '온체인 달러 예금' 역할을 한 셈이다.
하지만 국채는 토큰화 시장의 증명 무대일 뿐이다. 다음 타자는 훨씬 복잡하다.

프라이빗 크레딧이 진짜 시험이다
토큰화의 다음 단계는 부동산, 사모펀드(프라이빗 크레딧), 원자재, 엔터테인먼트 IP, 스포츠 선수 계약권까지 확장된다.
이 중 프라이빗 크레딧이 가장 중요한 스트레스 테스트다. 국채와 달리 여기에는 만기 관리, 신용 심사, 상환 리스크, 공시 의무, 부도 처리까지 복잡한 과정이 따른다.
국채 투자자에게는 접근성과 결제 기능만 있으면 된다. 프라이빗 크레딧 투자자에게는 리스크 분석, 공시 자료, 상품 간 비교, 라이프사이클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이것은 단순한 상품 판매가 아니다. 시장 인프라다.
규제는 장벽이 아니라 '필터'다
한국에서도 토큰증권 규제를 두고 "너무 엄격하다"는 불만이 나온다. 하지만 글로벌 흐름을 보면 관점이 달라진다.
규제는 토큰화 산업을 죽이지 않는다. 실험과 인프라를 분리할 뿐이다.
나중에 보안·인증·세금 처리를 덧붙이려 했던 플랫폼들은 시간이 바닥나고 있다. 처음부터 제도권 안에서 설계된 플랫폼은 규제가 명확해질수록 오히려 경쟁 우위가 생긴다.
한국 시장도 마찬가지다. 금융당국의 가이드라인을 조기에 충족한 플랫폼이, 나중에 급하게 맞추는 곳보다 기관 고객과 일반 투자자를 먼저 확보하게 된다.
다음 사이클의 승자는 누구인가
대부분의 미디어는 여전히 "어느 회사가 가장 큰 토큰화 상품을 만들었나"를 다룬다. 그 시각은 이제 틀렸다.
다음 사이클의 승자는 이 질문들에 답하는 곳이다.
여러 토큰화 자산을 한눈에 비교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KYC 한 번으로 글로벌 토큰화 자산에 접근할 수 있는 플랫폼은 어디인가. 원화 혹은 원화 연동 스테이블코인으로 결제하고 세금 신고까지 연동되는 서비스는 어디인가.
발행은 눈에 보이는 경쟁이다. 유통은 복리처럼 쌓이는 우위다. 눈에 보이는 경쟁이 헤드라인을 가져가고, 복리 우위가 시장을 가져간다.
인터넷 쇼핑몰 초창기, 물건을 가장 많이 올린 곳이 이긴 것이 아니다. 결제·배송·반품을 가장 편하게 만든 곳이 이겼다. 토큰화 시장의 그 자리를 어디가 차지할지, 지금이 바로 그 판이 갈리는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