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결제의 앞단으로 들어오고 있다. 지금까지의 AI는 주로 상품 추천, 사기 탐지, 고객 상담처럼 사람이 내린 결정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그러나 앞으로의 AI는 사용자의 목표를 이해하고, 가격을 비교하고, 조건을 따져본 뒤, 필요하면 결제 요청까지 만들어내는 ‘에이전트형 AI’로 진화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보고서에서 이를 결제 시스템의 구조적 변화로 봤다. 기존 결제가 사용자가 직접 버튼을 누르는 ‘클릭 투 페이(click-to-pay)’였다면, 에이전트형 AI 시대의 결제는 AI가 조건을 판단하는 ‘디사이드 투 페이(decide-to-pay)’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한국 독자에게 쉽게 풀면 이렇다. 지금은 소비자가 쇼핑앱에서 상품을 고르고, 쿠폰을 적용하고, 카드나 간편결제로 결제한다. 앞으로는 AI 비서에게 “이번 주 안에 가장 싼 가격으로 사무용 의자를 주문해줘”, “월 예산 30만 원 안에서 생필품을 자동 구매해줘”, “해외 거래처에 수수료가 가장 낮은 방식으로 송금해줘”라고 맡길 수 있다. AI는 가격, 배송, 수수료, 환율, 결제수단을 비교한 뒤 사용자가 정한 범위 안에서 결제를 진행하려 한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추천은 틀려도 다시 고르면 된다. 그러나 결제는 틀리면 돈이 움직인다. 장바구니가 잘못 채워지는 것과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한국은 이미 ‘AI 결제’가 들어오기 쉬운 시장이다
한국은 에이전트형 AI 결제가 확산되기 좋은 환경을 갖고 있다. 카드, 계좌이체, 간편결제, 간편송금, PG, 선불충전금, 오픈뱅킹 기반 서비스가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 소비자는 이미 비밀번호, 생체인증, 앱 승인만으로 결제하는 데 익숙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5년 중 간편지급 서비스 이용 규모는 일평균 3,557만 건, 1조1,053억 원으로 전년 대비 각각 14.9%, 14.6% 증가했다. 간편송금도 일평균 742만 건, 9,785억 원으로 각각 2.9%, 7.3% 늘었다. 이미 한국의 결제 시장은 “현금을 꺼내는 시장”이 아니라 “앱 안에서 돈이 움직이는 시장”이다.
따라서 에이전트형 AI는 한국에서 낯선 기술이라기보다, 기존 간편결제의 다음 단계로 들어올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는 사람이 앱을 열고 결제했다면, 앞으로는 AI가 앱과 결제망 사이에서 사용자의 의도를 해석하고 결제 후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소비자가 “가장 저렴한 항공권과 숙소를 찾아 예산 안에서 예약해줘”라고 지시하면 AI는 항공권, 숙소, 쿠폰, 카드 할인, 환율, 취소수수료를 동시에 비교할 수 있다. 기업 재무팀은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하는 해외 지급 건을 수수료와 환율을 고려해 최적 경로로 보내라”고 AI에 맡길 수 있다. 자영업자는 “매달 반복되는 구독료와 공급대금을 현금흐름에 맞춰 자동 처리하라”고 설정할 수 있다.
이것이 편리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결제시스템 입장에서는 매우 불편한 질문이 생긴다. “이 결제는 사람이 승인한 것인가, AI가 판단한 것인가.”
IMF의 핵심 메시지: AI가 판단해도, 돈은 규칙대로 움직여야 한다
IMF 보고서의 핵심은 단순하다. AI가 결제 전 단계에서 똑똑하게 움직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실제 승인과 정산까지 AI의 판단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결제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눈다. 첫째는 의도와 조율 단계다. AI가 사용자의 목표를 이해하고, 상품이나 결제 경로를 비교하고, 여러 선택지를 정리하는 영역이다. 둘째는 통제와 승인 단계다. AI가 만든 결제 요청이 사용자의 권한 범위 안에 있는지, 한도를 넘지 않았는지, 사기나 자금세탁 위험은 없는지 확인하는 영역이다. 셋째는 정산 단계다. 실제로 돈이 이동하고 결제가 최종 확정되는 영역이다. IMF 보고서 11쪽 표도 결제 여정을 이 세 단계로 나눠 AI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과 규칙 기반 통제가 필요한 영역을 구분한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이렇다.
AI는 “어떤 상품을 살지”, “어떤 카드가 유리한지”, “어느 송금 경로가 싼지”를 고를 수 있다. 그러나 “정말 결제해도 되는지”는 사전에 정해진 권한, 한도, 인증, 이상거래 탐지, 규제 요건이 판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실제 돈을 움직이는 은행망, 카드망, 전자금융 인프라,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예측 가능한 규칙에 따라 작동해야 한다.
결제는 창의력 경연장이 아니다. 결제망은 “아마 맞을 것 같다”가 아니라 “승인” 또는 “거절”로 끝나야 한다. AI는 확률적으로 판단하지만, 결제는 확정적으로 처리돼야 한다. 이 둘을 섞으면 사고가 난다.
국내 전자상거래의 변화: 소비자가 아니라 ‘소비자의 AI’를 설득해야 한다
에이전트형 AI가 가장 먼저 바꿀 영역은 전자상거래다. 한국의 온라인 쇼핑은 이미 가격비교, 리뷰, 빠른 배송, 카드 할인, 적립금, 쿠폰 경쟁이 치열하다. 여기에 AI 에이전트가 들어오면 경쟁 방식이 달라진다.
지금까지 쇼핑 플랫폼은 사람의 눈에 띄기 위해 검색 노출, 광고, 리뷰, UI를 최적화했다. 앞으로는 AI가 읽고 비교하기 쉬운 상품 데이터, 배송 조건, 반품 정책, 할인 정보, 결제 조건이 중요해진다. 소비자를 설득하는 시장에서 소비자의 AI 대리인을 설득하는 시장으로 바뀌는 것이다.
예를 들어 AI가 “가장 싼 가격”만 보지 않고 “배송 지연 가능성, 반품 편의성, 판매자 신뢰도, 카드 할인, 포인트 적립, 소비자 예산”까지 함께 판단한다면, 플랫폼과 판매자는 AI가 해석할 수 있는 표준화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광고 문구보다 데이터 품질이 더 중요해질 수 있다.
이는 국내 PG사, 카드사, 간편결제 사업자에도 영향을 준다. 앞으로 결제사업자는 단순히 결제 버튼을 제공하는 회사가 아니라, AI가 만든 결제 요청이 정상인지 검증하는 신뢰 인프라가 돼야 한다. 사용자 인증, 결제 한도, 토큰화, 사기 탐지, 거래 기록, 분쟁 처리 역량이 더 중요해진다.
해외송금·기업결제에서는 ‘AI 재무비서’가 등장할 수 있다
개인 소비보다 더 큰 변화는 기업결제와 해외송금에서 나타날 수 있다. 국경 간 결제는 환율, 수수료, 중개은행, 현지 결제망, 규제 확인, 시간대 차이가 얽혀 있다. 사람이 일일이 최적 경로를 찾기 어렵다.
AI 에이전트는 여러 결제 경로를 비교해 수수료가 낮고 처리 속도가 빠른 방식을 제안할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지급 시점, 환전 시점, 현금 보유액, 긴급 결제 우선순위를 자동으로 조정하는 ‘AI 재무비서’가 생기는 셈이다.
한국 기업에도 의미가 크다. 수출입 기업, 해외 플랫폼 판매자, 크리에이터, 프리랜서, 게임사, 디지털 콘텐츠 기업은 이미 달러·엔화·유로화 결제와 정산에 노출돼 있다. AI가 환율과 수수료를 보고 결제 경로를 추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다만 고액 기업결제나 해외송금은 소비자 쇼핑보다 위험이 크다. AI가 잘못된 계좌로 송금하거나, 제재 대상과 연계된 거래를 통과시키거나, 환율 변동을 잘못 판단하면 손실이 커질 수 있다. 따라서 기업결제에서는 AI의 자율성을 넓히되, 고액·해외·초회 거래에는 인간 승인과 강한 감사 기록을 붙이는 방식이 필요하다.
디지털자산 업계에는 더 직접적인 기회와 위험이 있다
토큰포스트 독자에게 중요한 대목은 디지털자산이다. 에이전트형 AI는 스테이블코인, 스마트컨트랙트 지갑, 계정추상화, 온체인 신원, 자동화 결제와 잘 맞는다. AI가 결제 조건을 판단하고, 스마트지갑이 한도와 권한을 확인하고, 블록체인 네트워크가 정산을 처리하는 구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용자가 AI에게 “월 10만 원 한도 안에서 해외 AI 서비스 사용료를 결제해줘”라고 설정할 수 있다. 스마트지갑은 하루 한도, 허용된 서비스, 승인된 토큰, 의심 거래 차단 조건을 코드로 집행한다. AI는 결제 필요성을 판단하지만, 지갑은 정해진 규칙 밖의 결제를 막는다. 이것이 IMF가 말한 ‘AI 판단과 결제 실행의 분리’와 맞닿아 있다.
한국에서도 디지털화폐와 디지털자산 결제 인프라 논의는 이미 진행 중이다. 한국은행은 2025년 4~6월 디지털화폐 활용성 테스트를 진행했으며, 만 19세 이상 국민이 7개 은행 앱을 통해 참여할 수 있도록 한 바 있다. 이 테스트는 미래 디지털 통화 인프라의 실제 활용 가능성을 점검하는 성격을 가졌다.
스테이블코인 논의도 결제 인프라 관점에서 중요하다. 한국은행의 2024년도 지급결제보고서는 금융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 시행과 스테이블코인 규율체계 마련 논의가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다만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구조와 관련한 구체적 제도 내용은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다. 금융위원회도 2026년 1월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인의 주주구성 등 2단계 법 주요 내용은 확정된 바 없다고 밝혔다.
즉, AI 에이전트와 스테이블코인의 결합은 가능성이 크지만, 한국에서는 제도 설계가 먼저 따라와야 한다. 빠른 결제는 장점이지만, 법적 책임과 준비자산 신뢰, 이용자 보호가 불명확하면 그 속도는 리스크를 더 빨리 퍼뜨리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질문: “AI가 결제했을 때 누가 책임지나”
에이전트형 AI 결제의 본질은 책임 문제다. 사용자가 직접 결제 버튼을 눌렀다면 책임 구조가 비교적 명확하다. 그러나 AI가 사용자의 포괄적 지시를 해석해 결제했다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사용자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결제사는 “사용자가 사전에 허용한 조건 안에서 승인됐다”고 할 수 있다. 플랫폼은 “우리는 결제 환경만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AI 개발사는 “모델은 도구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책임은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닌 상태가 된다.
그래서 앞으로 필요한 것은 거래별 클릭이 아니라 위임형 승인 체계다. 사용자가 AI에게 어떤 권한을 줬는지 기계가 읽을 수 있고, 사람이 나중에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조건이 명확해야 한다. 월 결제 한도는 얼마인가. 어떤 업종에서 결제할 수 있는가. 해외 결제는 가능한가. 새 판매자와의 첫 거래는 인간 승인이 필요한가. 가상자산 전송은 별도 인증이 필요한가. 일정 금액 이상은 무조건 중단되는가. AI가 어떤 이유로 결제를 추천했는지 기록이 남는가.
이런 장치가 없으면 AI 결제는 편리함보다 분쟁을 먼저 키울 수 있다.
한국형 해법은 ‘AI에게 지갑을 주되, 열쇠는 나눠 갖는 것’
한국 결제시장에 필요한 방향은 AI 결제를 막는 것이 아니다. 막을 수도 없고, 막는 것이 능사도 아니다. 문제는 AI가 어디까지 할 수 있고,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를 정하는 것이다.
첫째, AI 에이전트 신원 확인이 필요하다. 기존 금융은 고객확인, 즉 KYC에 익숙하다. 앞으로는 고객뿐 아니라 고객을 대신해 움직이는 AI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KYA, Know Your Agent가 필요해진다. AI가 어떤 서비스에서 만들어졌는지, 어떤 권한을 받았는지, 어떤 지갑이나 계정에 접근할 수 있는지 검증해야 한다.
둘째, 권한은 좁고 명확해야 한다. AI에게 “알아서 결제해”라고 맡기는 방식은 위험하다. “월 20만 원 이하”, “생활용품만”, “국내 가맹점만”, “처음 거래하는 판매자는 승인 필요”처럼 조건을 쪼개야 한다. AI에게 지갑을 맡기더라도 현관 비밀번호까지 알려줘서는 안 된다.
셋째, 의사결정과 결제 실행을 분리해야 한다. AI는 추천하고, 결제 시스템은 검증해야 한다. AI가 결제를 제안하더라도 카드사, 은행, PG, 지갑, 스마트컨트랙트가 한도와 위험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넷째, 감사 기록이 남아야 한다. AI가 어떤 데이터와 조건을 보고 결제 요청을 만들었는지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 분쟁이 생겼을 때 “AI가 그랬다”는 말만 남으면 소비자 보호도, 사업자 방어도 어렵다.
다섯째, 고위험 거래에는 사람이 개입해야 한다. 소액 반복 결제는 자동화할 수 있지만, 고액 송금, 해외송금, 가상자산 전송, 신규 수취인 거래, 비정상 시간대 거래는 인간 승인이나 추가 인증이 필요하다.
AI 결제의 승자는 ‘가장 똑똑한 AI’가 아니라 ‘가장 안전한 통제 구조’다
에이전트형 AI는 한국 결제시장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전자상거래에서는 AI가 소비자의 구매 대리인이 되고, 기업결제에서는 AI가 자금관리 보조자가 되며, 디지털자산 시장에서는 스마트지갑과 스테이블코인 결제를 자동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결제는 검색이나 추천과 다르다. 잘못된 검색 결과는 다시 찾으면 되지만, 잘못된 결제는 돈이 이동한다. 특히 블록체인 기반 결제나 해외송금처럼 되돌리기 어려운 영역에서는 통제 장치가 더 중요하다.
한국 시장의 과제는 분명하다. AI가 결제의 앞단에서 효율을 높이도록 허용하되, 실제 승인과 정산은 규칙 기반 인프라 안에 묶어야 한다. AI가 판단하고, 시스템이 검증하고, 사람이 필요한 순간에 개입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결국 AI 결제의 미래는 AI 모델의 성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위임, 인증, 한도, 감사, 책임, 정산 최종성을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승부처다. 결제의 미래는 더 똑똑한 비서가 아니라, 더 단단한 안전장치에서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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