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암호화폐 시장구조 법안인 디지털자산 시장 명확성 법안(CLARITY Act)이 상원 은행위원회를 통과했다. 상원 은행위는 14일(현지시간) CLARITY Act를 15대9로 가결해 상원 본회의로 넘겼다. 공화당 의원 13명 전원이 찬성한 가운데, 민주당 소속 루벤 갈레고 상원의원과 앤젤라 올소브룩스 상원의원이 찬성표를 던지며 초당적 통과 구도를 만들었다.
팀 스콧 상원 은행위원장은 이번 표결을 “역사적인 초당적 표결”로 평가하며, 법안이 디지털자산에 대한 명확한 규칙을 세우고 미국을 암호화폐 산업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 상원 은행위 공식 발표에 따르면 법안은 약 1년간의 협상 끝에 위원회를 통과했으며, 이제 상원 본회의 표결 절차로 넘어간다.
이번 표결의 의미는 단순한 위원회 통과가 아니다. 그동안 미국 암호화폐 산업은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의 관할권 충돌, 집행 중심 규제, 스테이블코인과 디파이(DeFi)에 대한 불명확한 기준 속에서 움직여왔다. CLARITY Act는 이 회색지대를 법률로 정리하려는 첫 대형 시도다.
핵심은 SEC-CFTC 관할 정리
CLARITY Act의 뼈대는 디지털자산의 성격에 따라 SEC와 CFTC의 감독 범위를 나누는 것이다. 법안은 거래소, 브로커, 커스터디 업체, 중개기관 등에 등록·공시·준법 의무를 부여하고, 디지털자산 거래와 스테이블코인, 시장 인프라 전반에 연방 차원의 규제 체계를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암호화폐 업계가 오랫동안 요구해온 방향이다. 업계는 “법을 지키고 싶어도 어떤 법을 따라야 하는지 모른다”고 주장해왔다. 반대로 SEC는 상당수 토큰과 거래 행위가 기존 증권법 적용 대상이라고 봐왔다. 이번 법안은 이 충돌을 정치적으로 정리하려는 시도다.
신시아 루미스 상원의원은 CLARITY Act를 두고 자신이 주·연방 공직 생활 동안 다뤄온 법안 중 “가장 어려운 입법”이라고 평가했다. 새로운 자산 유형과 소프트웨어 기반 금융 구조를 기존 금융법 체계 안에 넣는 작업인 만큼, 단순한 산업 진흥법이 아니라 금융시장 운영 원칙을 다시 쓰는 법안에 가깝다.
민주당 이탈표가 법안에 정치적 생명력 부여
이번 표결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민주당 내 균열이다. 갈레고와 올소브룩스가 공화당과 함께 찬성하면서 CLARITY Act는 “공화당 단독 법안”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났다. 본회의 통과에는 필리버스터를 넘기기 위한 60표 확보가 필요하기 때문에, 민주당 일부의 협조 없이는 법안 처리가 사실상 어렵다.
바로 이 점에서 두 민주당 의원의 찬성표는 상징적이다. 이들은 최종 법안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를 선언한 것이 아니라, 상원 본회의와 농업위원회 법안 병합 과정에서 윤리·집행·소비자 보호 조항을 더 다듬겠다는 조건부 신호를 보낸 것으로 해석된다. 원문 자료도 갈레고와 올소브룩스의 표결이 법안에 “초당적 뼈대”를 제공했지만, 본회의 지지는 추가 수정 여부에 달려 있다고 설명했다.
즉, 이번 통과는 완성이 아니라 협상의 다음 단계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다. 법안이 본회의 문턱 앞까지 간 이상, 이제 논쟁은 “법안을 만들 것인가”에서 “어떤 조건으로 만들 것인가”로 이동했다.
워런의 반대 논리: “암호화폐 업계가 쓴 법안”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CLARITY Act를 “암호화폐 업계가 암호화폐 업계를 위해 쓴 법안”이라고 비판하며, 투자자 보호와 소비자 보호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워런은 법안이 1929년 이후 투자자를 보호해온 증권법 체계에 구멍을 내고, 주정부 차원의 사기 방지 규제를 선점해 약화시키며, 은행들이 변동성 큰 암호화폐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을 키운다고 지적했다.
워런의 주장은 단순한 반(反)암호화폐 정서가 아니다. 핵심은 “규제 명확성”이라는 이름으로 실제로는 규제 회피 통로가 만들어지는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다. 특히 디파이와 스테이블코인, 믹서, 해외 불법 자금 흐름은 민주당 강경파가 가장 우려하는 지점이다.
상원 은행위 민주당 측 발표에서도 워런은 CLARITY Act가 소비자, 투자자, 국가안보, 금융시스템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며 강한 우려를 제기했다.
DeFi 조항, 민주당 분열의 결정적 지점
가장 민감한 쟁점 중 하나는 디파이 세이프하버다. 루미스 의원이 주도하고 마크 워너 민주당 의원과 협의한 기술 수정안은 디파이 프로토콜이 언제 소수 주체에 의해 통제되는지, 어떤 경우 중개기관으로 간주되는지에 대한 기준을 다듬었다. 이 수정안은 일부 기술적 수정을 거친 뒤 18대6으로 채택됐다.
이 표결은 민주당 내부 노선 차이를 드러냈다. 워런, 잭 리드, 크리스 밴 홀런 의원은 디파이 조항이 자금세탁방지 규정 적용을 회피할 수 있는 구멍을 만든다고 반대했다. 반면 워너, 캐서린 코르테즈 매스토, 올소브룩스 의원은 공화당과 함께 수정안에 찬성했다.
이는 미국 민주당 안에서도 암호화폐를 보는 시각이 더 이상 하나가 아님을 보여준다. 한쪽은 암호화폐를 금융 범죄와 투자자 피해의 통로로 본다. 다른 한쪽은 규제 없는 방치보다 연방 차원의 틀을 만드는 것이 낫다고 본다. 후자가 이번 표결에서 처음으로 실질적인 힘을 발휘했다.
스테이블코인·불법금융·믹서 규제는 여전히 뇌관
민주당 의원들은 불법금융과 국가안보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워런은 토네이도캐시 같은 믹서와 디파이 서비스에 대한 제재 수단을 강화하는 수정안을 냈지만 부결됐다. 잭 리드 의원은 이란 관련 행위자들이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해 드론 부품 구매, 민감 물품 수입, 호르무즈 해협 관련 자금 수취에 관여한다고 주장하며 외국 불법 스테이블코인 흐름을 차단할 명시적 권한을 요구했지만, 이 역시 통과되지 못했다.
크리스 밴 홀런 의원도 불법 활동과 연계된 지갑을 통해 막대한 디지털자산이 이동했다는 추정치를 언급하며, 자금세탁·제재 회피·테러금융 목적의 디파이 프로토콜 배포를 금지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공화당은 기존 형사법과 법안 내 자금세탁방지 조항으로 충분히 대응 가능하다고 맞섰다.
이 대목은 향후 본회의 협상의 핵심 변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 시장구조 법안이 산업 진흥법으로 비칠 경우 민주당 표 확보가 어렵다. 반대로 불법금융 규제가 과도하게 강화되면 디파이와 오픈소스 개발자 보호라는 법안의 취지가 흔들릴 수 있다.
트럼프 일가 암호화폐 이해충돌 논란도 변수
이번 심사 과정에서 또 하나의 민감한 쟁점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가족의 암호화폐 사업 관련 이해충돌 문제였다. 밴 홀런 의원은 대통령, 부통령, 의회 의원이 암호화폐 기업과 사업적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 윤리 수정안을 제안했지만 부결됐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과 가족이 암호화폐 벤처 및 관련 사업에 관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공화당은 해당 조항이 시장구조 법안의 범위를 벗어나며, 형사처벌 성격이 있는 만큼 법사위 소관에 가깝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민주당 강경파는 이 문제가 단순한 정치 공세가 아니라 암호화폐 법안의 신뢰성과 직결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CLARITY Act가 본회의에서 추가 민주당 표를 확보하려면, 트럼프 관련 윤리 조항이나 최소한 이해충돌 방지·공시 강화 장치가 다시 논의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최종 지지가 윤리와 집행 조항 보완 여부에 달려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업계에는 승리, 하지만 아직 최종 승부는 아니다
암호화폐 업계에는 분명한 호재다. CLARITY Act가 위원회를 통과하면서 미국 디지털자산 시장은 소송 중심 규제에서 입법 중심 규제로 이동할 가능성이 커졌다. 코인베이스 같은 거래소, 커스터디 업체, 브로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토큰화 자산 플랫폼은 더 명확한 제도권 진입 경로를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통과까지는 아직 여러 관문이 남아 있다. 법안은 상원 농업위원회 관련 법안과 병합될 예정이며, 이후 상원 본회의에서 60표 문턱을 넘어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하원안과 조율을 거쳐 대통령 서명까지 받아야 한다. 배런스는 이번 법안이 본회의에서 최소 7명의 민주당 지지를 추가로 확보해야 필리버스터를 넘을 수 있다고 짚었다.
이번 표결은 승리라기보다 승부처 진입이다. 업계가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이르다. 병은 열 수 있지만, 아직 마개는 반쯤 걸려 있다.
한국에 주는 시사점
미국의 CLARITY Act 논의는 한국에도 직접적인 시사점을 준다. 한국 역시 가상자산 2단계 입법, 스테이블코인 규율, 법인 시장 참여, 토큰증권 제도, 거래소 책임, 디파이 규제 범위 등을 정리해야 한다. 미국이 SEC-CFTC 관할 조정과 디파이 세이프하버, 스테이블코인 수익 제공 문제를 어떻게 절충하는지는 한국 입법에도 비교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중요한 점은 ‘규제 명확성’과 ‘규제 완화’가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 법안도 업계가 원하는 자유만 담고 있지 않다. 등록, 공시, 고객자산 보호, 자금세탁방지, 시장감시 의무가 함께 들어간다. 제도권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자유를 얻는 동시에 책임도 지는 일이다.
한국이 참고해야 할 방향도 여기에 있다. 규제 공백을 방치하면 산업은 해외로 빠져나가고, 과도한 규제로 묶으면 혁신은 시작도 못 한다. 필요한 것은 금지와 방임 사이의 정교한 시장구조 설계다.
결론: 미국 암호화폐 규제는 ‘반대냐 찬성이냐’를 넘어섰다
CLARITY Act의 상원 은행위 통과는 미국 암호화폐 입법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는 신호다. 과거 논쟁은 “암호화폐를 인정할 것인가”에 가까웠다. 이제 논쟁은 “어떤 규칙으로 인정할 것인가”로 바뀌었다.
워런 의원의 반대는 소비자 보호, 불법금융, 정치 윤리라는 중요한 경고를 담고 있다. 동시에 갈레고와 올소브룩스의 찬성표는 민주당 안에서도 암호화폐를 무조건 배척하기보다 제도권 틀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흐름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장은 이번 표결을 규제 명확성의 진전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최종 법안이 산업 친화적 프레임에만 머물면 본회의에서 민주당 표를 충분히 얻기 어렵다. 반대로 소비자 보호와 집행 조항을 과도하게 얹으면 업계가 기대한 ‘명확성’은 다시 복잡한 규제 부담으로 바뀔 수 있다.
결국 CLARITY Act의 운명은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암호화폐를 제도권에 넣는 법이 될 것인가, 아니면 제도권의 이름으로 또 다른 회색지대를 만드는 법이 될 것인가.
미국 의회는 이제 그 경계선을 긋는 단계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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