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질주하는데 왜 블록체인 AI는 멈췄나…타이거리서치, 수요와 해법의 ‘시차’ 진단

| 이도현 기자

AI 산업 전반의 호황에도 블록체인 AI 섹터는 좀처럼 주류 수요를 끌어오지 못하고 있다. 타이거리서치(Tiger Research)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그 배경이 기술 결합의 모순이 아니라, 기존 산업이 당장 해결하려는 병목과 블록체인 AI가 제시하는 해법 사이의 ‘미스매치’에 있다고 진단했다. 분산 컴퓨팅, 분산 스토리지, 데이터 마켓플레이스, 모델 검증·프라이버시, AI 에이전트 프레임워크 등 주요 영역은 각기 다른 문제의식을 갖고 등장했지만, 아직은 대규모 자본을 움직이는 엔터프라이즈 수요와 완전히 맞물리지 못했다는 평가다.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AI 산업은 거대언어모델(LLM) 확산과 함께 연산 자원, 메모리, 전력, 데이터 통신 등 실질적인 병목을 해소하는 기업에 자본이 집중되는 구조로 움직이고 있다. 실제로 고대역폭 메모리(HBM), 광통신,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처럼 즉각적인 성능 개선과 비용 절감 효과를 입증한 분야는 시장의 주목을 받았지만, 블록체인 AI 프로젝트는 ‘데이터 주권’이나 ‘탈중앙화’ 같은 의제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같은 수준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이 같은 괴리는 분산 컴퓨팅과 분산 스토리지에서 특히 선명하게 드러난다. 분산 컴퓨팅은 유휴 GPU 자원을 네트워크로 묶어 빅테크 중심의 자원 독점을 완화하겠다는 구상이다. 분산 스토리지는 파일코인, 알위브 같은 모델을 통해 데이터 소유권 회복과 영구 보존을 내세운다. 하지만 엔터프라이즈 수요자는 철학보다 안정성을 우선한다. 페타바이트급 데이터 동기화, 초저지연 처리, 서비스수준협약(SLA), 장애 발생 시 복구 가능성 등에서 기존 클라우드 사업자와 비교해 압도적 기술 우위를 보여주지 못하면 전환 리스크를 감수할 유인이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타이거리서치(Tiger Research)는 분산형 노드 구조가 갖는 본질적 불확실성도 수요 확대를 막는 핵심 변수로 짚었다. 익명의 참여자가 제공하는 자원에 의존하는 구조에서는 노드 이탈이나 품질 편차가 발생할 수 있고, 이로 인해 수십억 원 규모의 AI 학습 작업이 중단될 경우 사후 보상만으로는 기회비용과 시간 손실을 메울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기업 입장에서 블록체인 AI는 ‘보상 가능한 손실’이 아니라 ‘애초에 감당할 이유가 없는 불확실성’으로 인식될 수 있다.

데이터 마켓플레이스 역시 취지는 분명하다. 온체인 기반 직접 거래를 통해 데이터 제공자와 개발자가 중간자 없이 보상과 가격을 투명하게 정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오션 프로토콜, 그래스 등은 이러한 구조를 구현하려는 대표 사례로 언급된다. 다만 현재 시장에서 데이터 유통은 편의성과 규모, 기존 플랫폼 생태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단순히 투명성을 높인다는 이유만으로 대규모 수요 이동이 일어나기는 어렵다. 거래 효율성과 직접 가치 교환이라는 장점이 있음에도, 시장은 여전히 즉시성과 검증된 운영 경험을 더 중시하고 있다는 의미다.

모델·추론 검증과 프라이버시 기술은 또 다른 시간차 문제를 안고 있다. 영지식 머신러닝(ZKML) 기반 검증은 AI가 정해진 규칙대로 작동했는지, 민감정보를 노출하지 않고도 결과의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잠재력이 있다. 의료, 보험, 공공영역처럼 데이터 신뢰성과 보안이 중대한 분야에서는 특히 유효한 접근이다. 그러나 기업이 현재 비용을 감수하며 자발적으로 도입할 만큼 절박한 수요가 형성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영역은 기술의 준비 수준보다 제도 변화가 시장 개화의 선행 조건이라는 분석이다.

보고서는 유럽연합(EU)의 AI 법(AI Act)과 같은 규제 체계가 오히려 블록체인 AI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봤다. 데이터 출처, 보안, 책임 추적성, 검증 가능성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생기면, 그동안 부차적 가치로 여겨졌던 블록체인 기반 검증 기술이 필수 인프라로 재평가될 수 있어서다. 다시 말해 이 영역은 수요 부족이라기보다 ‘규제 선행형 시장’에 가깝다는 해석이다.

AI 에이전트 프레임워크는 다른 카테고리와 결이 다르다. 현재 마이크로소프트, 세일즈포스 등 주류 기업이 도입하는 에이전트는 대부분 사내 업무 자동화와 생산성 향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 블록체인 진영이 구상하는 에이전트 인프라는 고유 지갑과 신원을 가진 AI가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 프로토콜을 통해 외부 네트워크에서 자율적으로 거래하고 정산하는 구조다. 이는 단순 자동화를 넘어 기계 대 기계(M2M) 경제를 전제로 한 ‘다음 단계’ 인프라에 가깝다.

문제는 시장 성숙도다. 기업들은 아직 AI 도입의 투자 대비 효용을 입증하고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따라서 다중 에이전트가 외부 환경과 연결돼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구조는 개념적으로는 매력적이지만, 현재 우선순위의 최상단에는 올라와 있지 않다. 다만 보고서는 에이전트 결제 분야만큼은 전통 금융과 블록체인이 같은 출발선에서 경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영역으로 평가했다. 초소액, 고빈도, 국경 없는 정산은 기존 금융 시스템도 아직 완전히 풀지 못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결국 블록체인 AI가 외면받는 이유는 ‘쓸모없어서’가 아니라, 수요가 요구하는 시계와 공급자가 제시하는 해법의 시계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게 보고서의 핵심 결론이다. 분산 컴퓨팅과 스토리지는 가격 경쟁력과 데이터 주권이라는 명분을 갖췄지만 기술 격차가 아직 충분하지 않고, 검증·프라이버시 기술은 규제가 본격화돼야 수요가 뒤따를 가능성이 크며, 에이전트 프레임워크는 시장이 따라오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 시장을 바꾼 ‘킬러 유즈케이스’의 부재도 한계로 지목된다. 챗지피티(ChatGPT)가 AI 산업 전반의 수요와 자본 흐름을 바꿔놓은 것처럼, 블록체인 AI 역시 대중과 기업이 체감할 수 있는 결정적 사례를 아직 만들지 못했다. 이 때문에 초기 커뮤니티의 기대를 넘어 보수적인 주류 자본을 설득할 만한 준거 집단이 형성되지 않았고, 결국 프로젝트 가치와 산업 기대 사이에 괴리가 커졌다는 분석이다.

다만 타이거리서치(Tiger Research)는 블록체인 AI의 장기적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냉담함은 차세대 인프라가 시장의 본격적 수요를 만나기 전 거치는 ‘비즈니스적 시차’일 수 있다고 봤다. 향후 블록체인 AI가 주류 AI 밸류체인의 기준을 수용해 당장의 성능 공백을 메우는 방향으로 진화할지, 혹은 다음 패러다임을 겨냥한 인프라 구축에 집중할지는 각 프로젝트의 전략에 달려 있다는 지적이다. AI와 블록체인의 결합은 아직 검증이 끝난 서사가 아니라, 수요가 도달할 시간을 남겨둔 진행형 서사라는 의미다.

본 기사는 시장 데이터 및 차트 분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에 대한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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