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투자 업계가 인공지능(AI)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정작 성패를 가르는 핵심은 ‘AI 활용’ 자체보다 ‘어떤 데이터를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창업자의 발표 자료나 요약 보고서를 더 빨리 정리하는 수준으로는 투자 판단의 질을 근본적으로 끌어올리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헨리크 란드그렌(Henrik Landgren) 길리온 공동창업자 겸 최고제품기술책임자(CPTO)는 벤처투자와 사모투자, 은행권이 AI 전략을 경쟁적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기존 업무를 조금 더 빠르게 처리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짚었다. 그는 과거 스포티파이의 첫 분석 부문 부사장을 지낸 인물로, 현재는 AI 기반 투자 인텔리전스 플랫폼 개발을 이끌고 있다.
란드그렌은 벤처투자가 본질적으로 ‘과학’과 ‘예술’이 섞인 영역이라고 봤다. 투자자는 창업자의 추진력과 몰입도, 이른바 ‘창업자다움’을 평가해야 하지만, 실제 검토 과정에서는 방대한 데이터가 뒤따른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그 데이터 대부분이 창업자 측이 선별하고 가공해 제공한다는 점이다. 이 같은 정보 비대칭은 벤처투자 모델 전반에 깔린 구조적 한계로 지목된다.
그는 최근 AI가 오히려 투자 실무의 ‘노이즈’를 키울 수 있다고 진단했다. 피치덱과 기업 홈페이지를 짧은 시간 안에 만들 수 있고, 각종 수치도 강력한 AI 모델로 손쉽게 가공할 수 있게 되면서 투자자는 무엇이 실제 사업 현황이고 무엇이 포장된 서사인지 구분하기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AI가 아니라 원천 데이터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체계라는 해석이다.
란드그렌은 올바른 AI 도입의 출발점이 대규모언어모델(LLM)이 아니라 데이터라고 강조했다. 결제 기록, 마케팅 성과, 회계 시스템, 이사회 보고서처럼 기업 운영 실태를 보여주는 자료가 먼저 정비돼야 하며, 이후에야 AI가 의미 있게 작동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집을 살 때 집주인이 준비한 점검표만 믿지 않고 독립적인 실사를 하듯, 투자자도 창업자가 포장한 자료가 아니라 기업의 재무와 운영 데이터를 직접 들여다봐야 한다고 비유했다. 이런 방식이 가능해지면 애널리스트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확인하는 대신, 이미 상당 부분 검증된 상태에서 분석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의 판단이 필요한 영역, 예컨대 경영진의 역량이나 조직 분위기, 창업자의 설득력 같은 요소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할 수 있다.
이는 투자 위험을 바라보는 방식도 바꾼다. 기존에는 제한된 자료를 바탕으로 빠르게 결론을 내리거나, 반대로 데이터 정리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원천 데이터 접근성이 높아지면 숨겨진 약점과 거친 지점까지 더 이른 단계에서 파악할 수 있어, 투자 판단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는 논리다.
란드그렌은 이런 변화가 투자를 위축시키기보다 오히려 더 넓힐 수 있다고 봤다. 자본 효율성이 높고 고객 유지율이 좋은 기업이라도 성장세가 벤처캐피털의 기대만큼 가파르지 않거나, 해당 산업이 시장 유행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외면받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위험 수준을 보여주는 데이터에 제때 접근할 수 있다면, 금융기관은 지금보다 더 자신 있게 이런 기업에 자금을 공급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경쟁 측면에서도 데이터 인프라는 곧 투자 우위로 이어진다. 유망한 거래일수록 누가 더 빨리 확신에 도달하느냐가 승부를 가른다. 경쟁사보다 하루 먼저 투자의향서를 제시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성과가 된다. 데이터를 찾고 정리하느라 일주일을 보내지 않아도 되는 구조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는 앞으로 5년 뒤 투자 대상 기업의 모습이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AI 기반 하드웨어, 인프라, 새로운 딥테크 분야가 부상하면 전통적인 수익 모델이나 과거의 성공 지표만으로는 기업 가치를 평가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그래서 업계는 ‘AI가 기존 프로세스를 얼마나 빠르게 만들 수 있나’보다 ‘더 나은 투자 프로세스가 무엇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AI는 만능 해법이 아니라 도구에 가깝다. 벤처투자 업계가 진짜로 바꿔야 할 것은 화려한 AI 도입 사례가 아니라, 투자자가 기업을 더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돕는 데이터 인프라다. 그것이 갖춰지지 않으면, 업계는 그저 같은 ‘깜깜이 베팅’을 더 빠르게 반복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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