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립토 카드, 15억달러 결제 넘어도 ‘주거래 계좌’는 아직…타이거리서치, 금융 인프라 전환 조건 제시

| 이도현 기자

타이거리서치(Tiger Research)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크립토 카드의 월간 결제 규모가 15억 달러를 넘어섰지만, 이를 곧바로 보편적 금융 인프라의 정착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고 진단했다. 보고서는 크립토 카드가 기존 카드 결제망을 활용해 가맹점 확보의 병목을 우회했다는 점에서 1990년대 직불카드의 초기 확산 국면과 닮아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급여 입금과 고정 지출 같은 ‘일상적 금융 관계’를 아직 장악하지 못한 만큼 보조적 결제 수단의 성격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크립토 카드, 성장 수치보다 중요한 것은 계좌 관계의 확보

보고서에 따르면 크립토 카드는 비자, 마스터카드 등 기존 결제 인프라를 활용해 빠르게 이용 저변을 넓히고 있다. 그러나 카드 산업의 역사와 비교하면 현 시점은 표준화가 완성된 단계보다 초기 상용화 직전에 가깝다. 1958년 뱅크오브아메리카가 대규모 카드 발급에 나섰지만 인프라 미비로 실패를 겪었고, 이후 전자 정산 시스템 구축과 직불카드 대중화, 글로벌 표준 정착까지 약 20년이 걸렸다는 점은 지금의 크립토 카드 시장에도 시사점을 준다.

직불카드가 주류 결제 수단으로 자리 잡은 결정적 배경은 1990년대 급여 입금의 확산과 함께 ‘주거래 계좌’ 개념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반면 현재 크립토 카드는 대체로 스테이블코인 충전과 예치에 기반한 구조다. 반복적인 수입 유입과 정기 지출이 연결된 금융 습관이 지갑에 정착하지 않은 만큼, 카드 발급량이나 결제액만으로 시장 지배력을 논하기 어렵다는 것이 타이거리서치(Tiger Research)의 판단이다.

월 15억 달러 결제에도 시장 안착 신호로 보기 어려운 이유

크립토 카드 시장의 외형은 분명 빠르게 커지고 있다. 아르테미스 집계 기준으로 월간 결제 볼륨은 2023년 초 1억 달러 수준에서 2025년 말 15억 달러로 확대됐고, 연환산 규모는 180억 달러를 넘어섰다. 다만 이 수치만으로 크립토 카드가 글로벌 금융 인프라로 안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거래가 특정 사업자와 일부 지역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리닷페이(RedotPay)가 시장 과반 이상의 거래를 처리하는 압도적 사업자로 부상했으며, 주요 사용자 기반은 방글라데시, 인도, 이집트, 나이지리아 등 신흥국에 몰려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비중은 4%에 불과했다. 이는 크립토 카드의 핵심 수요가 선진국의 일반 소비자보다 달러 접근성이 낮고 송금 비용이 높은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현재의 크립토 카드는 글로벌 대중 금융 인프라라기보다 특정 지역의 실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틈새형 도구’에 가깝다.

기존 카드 네트워크와의 규모 차이도 여전히 현격하다. 비자와 마스터카드의 연간 결제 처리 규모가 24조~25조 달러에 달하는 반면, 크립토 카드의 연환산 결제액은 180억 달러 수준이다. 외형 성장에도 불구하고 체급 차이가 뚜렷하다는 뜻이다.

더 중요한 대목은 결제의 ‘회전율’이다. 비자의 온체인 분석 기준 스테이블코인의 리테일 거래 속도는 0.08로, 법정화폐 M1 유통 속도 1.65의 약 20분의 1에 그쳤다. 이는 이용자들이 스테이블코인을 급여처럼 지속적으로 받고 소비하는 구조가 아니라, 필요할 때만 충전해 간헐적으로 쓰는 성향이 강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보고서는 이 지점을 두고 크립토 카드가 아직 일상 결제의 기본 수단으로 흡수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시장을 움직이는 네 가지 사업 모델

타이거리서치는 현재 크립토 카드 산업을 발급 인프라 모델, 거래소 기반 모델, 디파이 기반 모델, 스테이블코인 네오뱅크 모델의 네 축으로 구분했다. 각각의 모델은 공략하는 사용자층과 수익 구조, 경쟁 우위가 다르다.

발급 인프라 모델은 비자·마스터카드 망 아래에서 카드 프로그램 운영, 정산, 발급을 담당하는 사업자군이다. 이 영역에서는 프로그램 매니저와 발급은행이 분리된 전통적 구조와, 레인(Rain)·립과 같은 풀스택 발급사가 공존하고 있다. 팬텀 카드, 메타마스크 카드, 노시스 페이 등 여러 브랜드가 겉으로는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인프라 사업자 위에서 구동된다는 점도 특징이다.

특히 경쟁 심화가 예상되는 이유는 전통 핀테크의 진입 때문이다. 니움(Nium)은 2026년 3월 비자와 마스터카드 양측에서 발급 가능한 스테이블코인 카드 플랫폼을 선보였고, 스트라이프(Stripe)의 브릿지(Bridge) 인수와 마스터카드의 비브이엔케이(BVNK) 인수 추진 역시 이 시장의 전략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단순 발급 기능만으로는 방어력이 약해지고 있으며, 레인이 내세우는 일일 스테이블코인 정산이나 AI 에이전트용 가상카드 발급 기능 같은 차별화가 핵심 경쟁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거래소 기반 모델은 카드를 직접적인 수익원보다 사용자 락인 수단으로 활용한다. 거래소는 이미 보유한 고객 잔고와 거래 데이터를 카드와 연결해 플랫폼 이탈을 줄이고, 실제 수익은 거래 수수료나 대출, 예치금 운용에서 창출한다. 다만 자체 토큰 캐시백은 토큰 가격 변동성에 따라 실질 혜택이 흔들릴 수 있고, 미국의 지니어스 법(GENIUS Act)처럼 스테이블코인 이자 지급을 제한하는 규제는 사업 확장성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디파이 기반 모델은 ‘지갑이 곧 계좌’라는 철학에 가장 가깝다. 이용자는 중앙화 거래소에 자산을 맡기지 않고 온체인 지갑에서 자산을 직접 보관한 채 결제를 수행한다. 다만 담보 설정, 볼트 관리, 청산 리스크 추적 등 사용자 부담이 크고, 결제 시점마다 온체인 변환이 발생해 가스비와 속도 문제가 뒤따른다. 메타마스크 카드가 리네아(Linea)를 채택하고, 트리아가 가스리스 충전 기능을 내세운 것은 이런 마찰 비용을 줄이기 위한 대응으로 해석된다.

현재 시장 볼륨 측면에서 가장 강한 축은 스테이블코인 네오뱅크 모델이다. 카드 자체보다 계좌 기능에 초점을 맞춰 외환, 송금, 저축과 지출을 결합하는 구조다. 화폐가치가 불안정하고 달러 접근성이 제한된 신흥국에서는 높은 효용을 제공한다. 리닷페이가 이 모델의 대표 주자로 꼽히며, 후발 사업자들은 USD 기반 또는 자체 토큰 기반 캐시백으로 이용자 확보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혜택만으로는 장기적 충성도를 확보하기 어렵고, 결국 급여 수취와 반복 지출을 연결하는 금융 관계를 얼마나 구축하느냐가 관건으로 남는다.

결제 기능만으로는 한계…향후 재편의 기준은 세 가지

보고서는 크립토 카드 산업이 이제 결제라는 단일 기능만으로는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단계에 들어섰다고 분석했다. 전통 카드사와 네오뱅크도 단순 결제 서비스만으로는 수익성과 차별화를 확보하지 못했으며, 예대마진이나 주거래 계좌 관계가 형성된 이후에야 본격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완성됐다. 크립토 카드 역시 같은 임계점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규제 환경이다. 미국의 지니어스 법, 유럽의 미카(MiCA) 등 주요 제도는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이자 지급과 자산 운용에 제약을 두고 있다. 이 때문에 카드 사업자가 전통 금융처럼 예치 자산을 활용한 수익 구조를 설계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생존 요건은 더욱 선명해진다. 첫째, 비자 결제 이전 단계의 자금 흐름을 직접 소유할 것. 둘째, 대형 기관이 충분히 장악하지 못한 신흥국 유즈케이스를 선점할 것. 셋째, 인프라 사업자가 대체하기 어려운 ‘고유한 계좌 관계’를 구축할 것이라는 점이다.

타이거리서치(Tiger Research)는 직불카드 시대에도 최종 승자는 가장 많은 카드를 뿌린 사업자가 아니라, 소비자의 실제 은행 계좌를 선점한 플레이어였다고 짚었다. 크립토 카드 시장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월간 결제액 증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크립토 카드가 일상 금융의 필수 인프라로 자리 잡으려면 단순한 선불형 소비 도구를 넘어 자금 유입과 지출, 저축과 송금까지 잇는 생활 금융의 중심으로 진화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서비스는 더 나은 혜택을 앞세운 한시적 수단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본 기사는 시장 데이터 및 차트 분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에 대한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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