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렛팩커드엔터프라이즈(HPE)가 미 법무부와의 합의를 통해 주니퍼네트웍스 인수 건을 마침내 마무리하면서, HPE는 본격적인 AI 네트워킹 기업으로의 변신을 가속화하게 됐다. 140억 달러(약 20조 1,600억 원) 규모의 이번 거래를 통해 주니퍼의 보안 및 네트워킹 기술이 HPE의 아루바 네트워크 포트폴리오에 합류하고, HPE는 시스코(CSCO)와의 기업용 무선랜 시장 경쟁에서 한층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게 된다.
그동안 거래 성사는 불투명했다. 미 법무부는 HPE와 주니퍼의 연합체가 시스코와 함께 미국 무선랜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경쟁 제한을 우려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러한 논리에 회의적이었다. 실제로 네트워크 시장은 기술 트렌드 변화에 따라 빠르게 점유율이 바뀌는 구조다. 과거 브랜치 라우터 분야를 90% 이상 장악했던 시스코도 소프트웨어 정의 광역 네트워크(SD-WAN)의 부상과 함께 VMWare, 포티넷, 그리고 HPE 등에게 점유율을 내줬다. 스마트폰 시장 역시 팜, 블랙베리를 거쳐 아이폰과 안드로이드가 주도권을 가져간 바 있다.
AI 전환은 이번 인수의 핵심 축이다. HPE는 향후 네트워크의 중심축으로 AI를 전면에 내세울 방침이며, 이를 위해 아루바 기술에 주니퍼의 미스트 AI 기술을 결합할 예정이다. 실제로 지난해 더큐브 리서치와 함께 진행한 조사에서 90% 이상의 기업들이 ‘더 우수한 AI 네트워크 기술이 있다면 공급업체를 바꾸겠다’고 답한 만큼, AI가 차세대 네트워크 생태계의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란 기대가 크다.
다만 DOJ와의 합의는 HPE에 몇 가지 양보를 요구했다. HPE는 IT 담당 인력이 거의 없는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인스턴트온(Instant On)’ 무선랜 사업 부문을 분리 매각하게 된다. 180일 이내에 인수자를 찾아야 하며, 관련 기술 및 고객 자산까지 모두 이전돼야 한다. 또 다른 조건으로는 주니퍼의 AI 네트워크 운영 소프트웨어인 ‘미스트(Mist)’의 소스코드를 한정된 사업자들에게 라이선스해야 한다. HPE는 최대 2개 기업에 소스코드를 공급하게 되며, 이 중에는 별도의 오픈 경매를 통해 입찰가 800만 달러(약 115억 2,000만 원)를 초과한 기업만 뽑힐 수 있다.
라이선스를 받은 기업은 HPE-주니퍼로부터 최대 30명의 미스트 관련 엔지니어와 25명의 영업 인력을 이관받을 수 있다. HPE는 이들이 새 기업으로 자발적으로 이직하도록 금전적 인센티브를 제공할 예정이다. 또한, 인수 후 1년간의 전환 지원 서비스도 제공된다. 단, 계약에는 기존 직원 스카웃을 막기 위한 1년간의 비유인 조항이 포함된다.
업계 일각에서는 이번 라이선스 조항이 다소 난해하다는 반응도 나온다. 인스턴트온을 분리하는 것은 시장 집중도를 낮출 수 있지만, 미스트 소스코드를 외부에 제공하는 것은 오히려 자사 고유 기술을 경쟁사에 넘겨주는 것이란 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규제 장벽이 모두 해소된 지금, HPE와 주니퍼는 본격적인 통합 작업에 착수할 수 있게 됐다. 지난 ‘디스커버’ 행사에서 안토니오 네리 HPE CEO는 네트워크가 현대 IT와 AI의 근간이라며 미래 전략의 중심축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아루바와 미스트의 결합으로 HPE는 컴퓨팅 분야를 넘어 네트워크 업계 전반에서 입지를 넓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주니퍼 입장에서도 이번 인수는 호재로 작용한다. 탄탄한 AI 기술력에 더해 HPE의 막강한 예산과 고객 기반이 결합되며 R&D 확장과 신규 시장 진입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미 양 사의 고객 일부는 제품 통합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있지만, HPE와 주니퍼 양측은 기존 제품을 단종시키지 않고 병행 운영하며 점진적으로 통합할 계획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번 합의는 단순한 M&A를 넘어 AI 네트워크 시장의 구조를 바꿀 전환점이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 시절부터 강력해진 반독점 기조가 이번 거래도 위협했지만, 결국 혁신 가능성을 입증하며 HPE는 다음 단계를 밟게 됐다. 이제 이 합병의 성공 여부는 실제 고객 경험과 제품 성능, 그리고 시장의 반응으로 가늠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