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이 자국 금융 데이터에 대한 미국 기술기업의 접근을 제한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디지털 금융 주도권을 둘러싼 미·EU 간 긴장이 다시 고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9월 21일(현지시간) 유럽연합(EU)이 메타, 애플, 구글, 아마존 등 미국계 빅테크 기업을 유럽 내 금융 데이터 공유 시스템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 시스템은 핀테크 기업이나 스타트업이 은행 및 보험사 데이터를 활용해 개인 맞춤형 디지털 금융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해당 기업들을 배제하면 사실상 미국 기술기업의 금융시장 진입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

이번 조치는 빅테크가 소비자 금융 데이터를 활용해 기존 은행의 역할을 대체하리라는 유럽 금융권의 우려에서 비롯됐다. 소비자 행동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고도화된 서비스 제공이 가능해지면서, 빅테크가 은행 고객과 직접 관계를 맺고 기존 금융 시스템을 우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럽 은행권은 이를 두고 개인정보의 상업적 활용뿐 아니라 시장 지배력 강화를 위한 전략적 접근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독일은 EU 회원국들에게 보낸 공식 제안을 통해 금융 데이터 규제안(FiDA)에서 빅테크를 배제하자고 촉구했다. 독일의 입장은 디지털 금융 생태계를 유럽 주도로 강화하고, 공정한 경쟁 질서를 세우며, 소비자의 디지털 주권(자신의 데이터가 어떻게 사용될지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유럽의회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도 이에 호응하면서 규제안 논의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로써 2년 넘게 이어져 온 규제안 협상은 조만간 최종 단계에 접어들 전망이다. 유럽 외교 소식통들은 이미 빅테크들의 패배는 확정적이라고 보고 있으며, 올가을 중에는 최종 규제안이 확정될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다만 이러한 조치가 미·EU 간 외교 갈등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자국 기술기업에 불리한 세금이나 규제에 대해 보복 관세를 경고한 바 있다. 실제 미국과 유럽은 지난 7월 디지털세 관련 잠정 합의를 이뤘지만, 이번 EU의 움직임으로 긴장이 다시 불붙을 공산이 커졌다.

미국 빅테크 진영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 기업이 포함된 컴퓨터통신산업협회(CCIA) 유럽지부는 이번 결정이 오히려 기존 은행들의 독점을 고착화하고, 소비자의 선택권을 제한하게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빅테크의 금융 시장 참여가 소비자에게 더 많은 대안과 경쟁적 혜택을 줄 수 있는데, 이를 제한하는 것은 시대 흐름에 역행한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흐름은 향후 디지털 금융 플랫폼의 규제 기준을 놓고 국제적 갈등이 심화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유럽은 자국의 소비자 보호와 금융 주권 강화를 우선하겠지만, 이에 따른 무역 분쟁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결국 디지털 시장에서의 규제 주도권을 놓고 각국 간 정치·경제적 셈법이 복잡하게 얽히는 양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