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수십조원 규모의 채권 매수로 국내 크레디트 발행시장의 조달 공백을 메웠다. 다만 특정 자금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일부 발행사에서는 만기 때 차환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경계감도 나타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AA등급 이상 3년 이하 크레디트물을 중심으로 채권을 사들이고 있다고 연합인포맥스가 11일 전했다. 단기물에서 시작해 공사채와 은행채, 증권채, 우량 여신전문금융회사채까지 투자 범위를 넓혔다.
반도체 호황으로 늘어난 현금성 자산을 채권시장에서 운용한 결과다. 대규모 자금이 우량 채권으로 유입되면서 기업과 공공 부문의 발행 물량을 흡수하는 핵심 수요처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4분기부터 시장금리가 오르면서 국내 기관의 크레디트물 매수 여력은 약해졌다. 이 과정에서 SK하이닉스 자금이 수요 공백을 상쇄해 대규모 발행에 나선 기업들의 조달 부담을 덜었다.
크레디트물은 기업과 금융회사, 공기업 등이 신용을 바탕으로 발행하는 채권이다. 발행사는 만기 때 기존 채권을 갚기 위해 새 채권을 발행하는 차환에 나서는데, 당시 시장 수요와 금리 수준에 따라 조달 부담이 달라진다.
7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이후에는 시장 흐름이 일부 달라졌다. 비워둔 채권 운용 한도를 채우려는 기관들이 크레디트물 매수에 나서면서 SK하이닉스의 존재감이 이전보다 낮아졌다.
금리 눈높이가 맞지 않아 SK하이닉스가 입찰에 참여하고도 물량을 받지 못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매수 주체가 늘어나면서 발행사가 특정 투자자에게 기대지 않고 자금을 조달할 여지가 생긴 것이다.
반면 SK하이닉스 자금이 특정 등급과 만기에 집중된 데 따른 쏠림 우려는 남아 있다. 한전채처럼 한 번에 조 단위로 발행할 수 있는 물량은 만기 도래 시점에 같은 규모의 매수 주체가 없으면 차환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일부 국책은행과 공기업은 SK하이닉스 자금 유입에 경계감을 보이고 있다. 한 채권시장 관계자는 “하이닉스가 녹록지 않은 시장 환경에 등장해 기업들의 조달 길을 열어주긴 했으나 비싼 가격보다 무서운 게 차환 리스크이다 보니 일부 국책은행과 공기업들은 차츰 하이닉스 물량을 받지 않겠다로 기류가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발행사로서는 당장의 조달금리를 낮추는 것뿐 아니라 만기 때 재매수할 투자자가 있는지도 따져야 한다. 특정 투자자에게 발행 물량이 집중될수록 해당 자금의 운용 방침이 바뀔 때 수요 공백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관의 매수가 일부 회복됐지만 채권시장 전반으로 자금이 유입되는 단계는 아니라는 평가도 나왔다. 최근 수요는 기관들이 비워둔 운용 한도를 채우는 수준이어서 투자자 저변을 넓히는 일이 발행시장의 과제로 남아 있다.
SK하이닉스의 영향력이 과대평가됐다는 반론도 있다. 김상만 하나증권 수석연구위원은 “일반 기업의 여유자금 운용으로 채권 수급을 얘기하는 건 다소 지나쳐 보인다”며 “회사가 보유한 현금성 자산이 빠르게 늘고는 있지만 몇십조원 규모인 데다 기관 투자자의 자금 규모를 생각하면 SK하이닉스로 채권 수급을 논하는 건 과도한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주식시장에서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한 자금 쏠림이 시장 변동성을 키우는 구조가 지적된 바 있다. 본지는 앞서 한국 증시의 변동성이 비트코인(BTC)을 웃돈 배경으로 두 반도체 대장주의 높은 비중을 짚었다. 이번 사안은 주식과 채권시장에서 대형 반도체 기업의 자금 흐름이 국내 시장 수급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SK하이닉스는 3분기 중 추가 주주환원 방안을 확정하겠다고 밝혔다. 채권시장 참여자들은 이에 따른 회사의 자금 소요와 채권 운용 여력 변화를 살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