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암호화폐 거래소들이 암호화폐 중심 사업모델에서 벗어나 주식과 파생상품, 수탁 등 전통 금융으로 빠르게 보폭을 넓히고 있다. 타이거리서치(Tiger Research)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거래 수수료 기반 수익모델의 한계, 하이퍼리퀴드(Hyperliquid) 같은 탈중앙화 파생시장 성장, 미국 규제 환경 변화가 맞물리며 거래소의 전략 전환이 본격화됐다고 진단했다. 핵심은 중앙화 거래소가 더 이상 알트코인 유동성 공급자에 머무르지 않고, 전통 금융 상품을 흡수하는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변화는 누가 봐도 뚜렷하다. 세계 최대 거래소 바이낸스는 6월 1일부터 애플(AAPL), 구글(GOOGL) 등 미국 주식 거래를 앱 내에서 지원하기 시작했고, 이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대표 종목까지 범위를 넓혔다. 이는 2021년 주식 토큰 서비스를 내놨다가 각국 규제 압박으로 철회했던 시도와는 결이 다르다. 당시에는 주식 토큰의 법적 성격이 불분명했고 투자설명서와 직접 인가 문제도 걸림돌이었지만, 이번에는 아부다비 글로벌 마켓(ADGM) 인가 브로커딜러를 활용해 ‘브로커리지 서비스’ 구조를 명확히 했다.
이 같은 흐름은 바이낸스만의 선택이 아니다. 바이빗(Bybit)은 미국 주식과 원자재를 기초자산으로 한 무기한 선물 상품을 잇달아 상장했고, 코인베이스(Coinbase)는 스페이스X(SPCX) 프리IPO 거래 지원 계획까지 공개했다. 거래소들이 비슷한 시점에 전통 금융으로 이동하는 배경에는 구조적 압력이 있다. 타이거리서치는 이를 거래량 감소, 온체인 경쟁 심화, 규제 환경 변화라는 세 축으로 정리했다.
우선 암호화폐 거래량 감소는 거래소 수익성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바이낸스 기준 알트코인 일평균 현물 거래량은 2025년 10월 약 450억 달러에서 현재 77억 달러 수준으로 80% 넘게 줄었다. 다른 중앙화 거래소를 합산한 거래량 역시 큰 폭으로 감소했다. 거래소의 본업이던 매매 수수료 수익이 흔들리자, 암호화폐 거래소 스스로 새로운 수익원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몰린 셈이다.
두 번째 압력은 하이퍼리퀴드 같은 탈중앙화 거래소의 급부상이다. 하이퍼리퀴드는 주식과 원자재 선물 거래를 지원하며 온체인 유동성을 빨아들이고 있다. 2026년 중반 기준 하이퍼리퀴드 무기한 선물 거래량 상위 30개 자산 가운데 23개가 암호화폐가 아닌 주식과 원자재였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온체인이 더 이상 암호화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의미다. 거래소 입장에서는 리테일 이용자와 유동성이 중앙화 플랫폼 밖으로 이동하는 상황을 손 놓고 볼 수 없게 됐다.
세 번째는 규제 변화다. 트럼프 행정부 이후 미국 내 규제 기조가 완화되면서 코인베이스와 크라켄(Kraken)을 상대로 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소송이 철회되는 등 제도권 진입 여건이 이전보다 부드러워졌다. 과거에는 전통 금융 인가 취득이 규제 리스크를 키우는 요인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오히려 신뢰와 경쟁력을 높이는 자산으로 바뀌고 있다. 이 대목에서 ‘규제 친화성’은 전통 금융 확장의 전제조건으로 작동한다.
거래소별 전략은 조금씩 다르다. 바이낸스는 ‘에브리띵 스토어’ 전략을 앞세운다. 이미 2억 명이 넘는 사용자 기반을 보유한 만큼, 이들이 플랫폼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주식과 브로커리지 기능을 내부에 붙이는 방식이다. 주문은 바이낸스 프론트엔드에서 접수되지만 실제 실행과 결제, 수탁은 ADGM 인가 브로커딜러와 알파카 시큐리티즈가 맡는다. 규제 부담은 줄이면서도 거래 흐름은 플랫폼 안에 붙드는 구조다.
바이빗은 온체인과 오프체인을 함께 잡는 ‘투트랙’ 접근을 택했다. 한편으로는 백드(Backed), 맨틀과 협력해 엔비디아(NVDA), 애플(AAPL) 등 토큰화 주식을 온체인에 올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화 거래소 안에서 미국 주식과 금, 은, 원유 같은 전통 자산의 무기한 선물을 확대하고 있다. 이 전략은 사용자가 주식과 파생상품을 어떤 방식으로 거래하든 바이빗 생태계 안에 머무르게 하려는 계산으로 읽힌다.
코인베이스는 규제 신뢰와 기관 고객 기반을 무기로 삼는다. 나스닥 상장사이자 S&P500 편입 기업인 코인베이스는 데리빗(Deribit) 인수와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인가 선물 중개 서비스 강화로 기관 중심 파생시장 지배력을 높였다. 여기에 기존 앱에서 주식과 ETF 거래를 열며 전통 금융과 암호화폐를 한 화면에 담는 전략을 펴고 있다. 하이퍼리퀴드가 규제 바깥에서 상품 다변화에 나섰다면, 코인베이스는 제도권 신뢰를 바탕으로 정면 대응에 나선 셈이다.
크라켄은 보다 선명하다. 암호화폐 거래소를 넘어 ‘연방 규제 하의 기관용 암호화폐 은행’으로 진화하려는 구상이다. 닌자트레이더와 비트노미얼 인수를 통해 CFTC 라이선스를 보강했고, 연방준비제도 마스터 계좌 확보와 미국 통화감독청(OCC) 국가 신탁회사 인가 신청까지 진행했다. 온체인에서도 잉크(Ink)와 관련 디파이 서비스를 내놨지만, 초점은 어디까지나 기관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자산과 인프라에 맞춰져 있다.
문제는 이 전환의 반대편에 놓인 암호화폐다. 과거 중앙화 거래소는 알트코인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유동성 공급자였다. 상장과 마케팅, 런치풀, 거래량 지원이 프로젝트 생존을 좌우했다. 하지만 이제 거래소들이 주식과 파생상품, 수탁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알트코인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 타이거리서치(Tiger Research)는 이를 사실상 암호화폐의 ‘각자도생’ 국면으로 해석했다.
실제로 시장은 거래소 지원만으로 버티는 토큰보다 실질 매출과 제품 경쟁력으로 가치를 입증한 프로젝트를 선호하는 흐름으로 이동하고 있다. 하이퍼리퀴드의 HYPE가 대표 사례다. 온체인 유동성을 전통 자산으로 흡수한 주체임에도 자체 토큰 퍼포먼스는 강했다. 이는 중앙화 거래소와 알트코인의 공생 구조가 예전만 못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거래소가 키워주는 시장’에서 ‘프로젝트가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시장’으로 무게중심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암호화폐 거래소의 전략 전환은 단순한 사업 다각화가 아니다. 거래소 산업의 본질이 암호화폐 중개에서 종합 금융 플랫폼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거래소는 이제 암호화폐 없이도 성장할 방법을 찾고 있고, 이 변화는 알트코인 시장에 더 차가운 겨울을 예고한다. 암호화폐 거래소가 전통 금융으로 향하는 지금, 살아남는 프로젝트와 그렇지 못한 프로젝트의 격차는 더 가파르게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