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 드림플러스에서 열린 ‘심버스 데이 2026’를 다녀왔다.
행사장을 나오며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새로운 메인넷도, 새로운 지갑도 아니었다.
‘신뢰(Trust)’였다.
최근 블록체인 업계는 AI와의 결합을 경쟁적으로 이야기한다. AI 에이전트, 실물자산 토큰화(RWA), 스테이블코인, 디지털 자산….
새로운 서비스는 계속 등장하고 있지만, 이번 심버스 데이가 던진 질문은 조금 달랐다.
AI가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시대에도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이번 발표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새로운 기능을 소개하는 데 있지 않았다.
발표의 중심에는 '양자 시대에도 블록체인의 신뢰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기술보다 '신뢰'를 이야기하다
최수혁 심버스랩스 대표는 미래를 ABC 시대로 설명했다.
A는 AI(Artificial Intelligence), B는 Blockchain, C는 Computing, 즉 양자컴퓨팅이다.
처음에는 미래 기술을 단순히 나열한 개념처럼 들렸다.
하지만 발표를 들을수록 ABC의 핵심은 AI도, 블록체인도, 양자컴퓨팅도 아니었다.
신뢰였다.
AI는 텍스트와 이미지, 데이터와 서비스를 끊임없이 생성한다.
양자컴퓨팅은 지금까지 안전하다고 믿어왔던 암호체계를 위협한다.
그리고 블록체인은 그 사이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누구를 믿을 수 있는지를 증명해야 하는 기술이 된다.
결국 ABC는 세 가지 기술을 설명하는 공식이 아니라,
세 기술이 만나면서 신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시험받는지를 설명하는 프레임워크처럼 읽혔다.
블록체인의 경쟁도 달라지고 있었다
그동안 블록체인 업계는 TPS(초당 처리속도)와 수수료 경쟁을 이어왔다.
누가 더 빠른가.
누가 더 많은 거래를 처리하는가.
확장성이 곧 경쟁력이었다.
하지만 이번 발표를 들으며 다른 변화가 보였다.
앞으로는 얼마나 빠른 블록체인인가보다 얼마나 신뢰를 증명할 수 있는 블록체인인가가 더 중요한 경쟁력이 될 수도 있다.
이미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는 양자내성 암호(PQC) 표준화를 진행하고 있고, 국내 역시 양자내성 암호 전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더리움을 비롯한 글로벌 메인넷들도 양자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양자내성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연구 주제가 아니라 블록체인 산업이 마주한 현실이 되고 있었다.
한 번 검증하고, 영원히 신뢰하다
심버스가 제시한 기술 철학은 한 문장으로 압축됐다.
"Verify Once, Trust Forever."
"한 번 검증하고, 영원히 신뢰한다."
기존 블록체인은 거래가 끝난 이후에도 검증 데이터를 계속 저장하는 구조를 유지해 왔다.
반면 심버스는 검증이 완료된 데이터는 요약해 저장하고, 그 결과를 신뢰하는 구조를 제안했다.
발표에서는 이를 CAD 알고리즘으로 설명했다.
이 기술이 앞으로 글로벌 표준이 될지는 아직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번 발표의 핵심은 기술보다 질문이었다.
블록체인의 신뢰는 정말 모든 데이터를 영원히 저장해야만 유지되는가.
이번 심버스는 그 오랜 전제를 다시 묻고 있었다.
기술보다 방향이 남았다
기조연설에 나선 김형중 한국핀테크학회장도 이러한 접근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심버스의 논문을 검토한 뒤 기존 블록체인의 사고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새로운 접근이라고 평가했다.
최수혁 대표가 기술을 설명했다면,
김형중 교수는 그 기술이 산업에 던지는 의미를 해석한 셈이다.
발표를 듣다 보니 심버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메인넷 하나가 아니었다.
앞으로 블록체인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더 가까웠다.
코인이 아니라 신뢰 인프라를 이야기하다
이번 행사에서는 메인넷 업그레이드 외에도 Citizen ID, 자기주권형 신원(SSI), Salt 2.0, 멀티체인 구조, 기업용 플랫폼, 의료 AI, 환경 프로젝트, 문화유산 프로젝트 등이 함께 소개됐다.
주제는 달랐지만 방향은 하나였다.
블록체인을 코인을 전송하는 기술이 아니라 디지털 신뢰를 관리하는 인프라로 확장하려는 시도였다.
특히 SSI 기반 로그인은 눈에 띄었다.
지금 대부분의 온라인 서비스는 구글이나 애플 같은 중앙화된 로그인 체계에 의존한다.
반면 심버스는 블록체인 지갑 자체를 신원 인증 수단으로 활용하는 구조를 제안했다.
AI가 사람을 대신해 계약하고 거래하는 시대가 온다면,
중요한 것은 자산보다 누가 그 행위를 했는지를 증명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블록체인의 역할 역시 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나는 이날 새로운 메인넷을 본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단순한 기술의 진화가 아니다.
블록체인의 존재 이유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비트코인은 가치(Value)를 증명했다.
이더리움은 계약(Contract)을 확장했다.
그리고 AI가 모든 것을 생성하고 양자컴퓨팅이 기존 암호체계를 흔드는 지금,
블록체인은 신원(Identity)과 신뢰(Trust)를 증명하는 인프라로 역할이 옮겨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번 발표에서 제시된 기술들이 산업 표준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더 많은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장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완성도가 아니라 방향일 것이다.
나는 이날 새로운 메인넷을 본 것이 아니었다.
AI 시대가 깊어질수록 블록체인의 존재 이유가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현장을 보았다.
좋은 기술은 화려한 기능을 하나 더 만드는 기술이 아니다.
시대가 아직 답하지 못한 질문을 먼저 던지는 기술이다.
AI는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럴수록 블록체인이 증명해야 하는 것은 더 많은 거래가 아니라, 더 깊은 신뢰인지도 모른다.
이번 심버스 데이는 새로운 메인넷을 발표한 행사가 아니라,
AI 시대 블록체인이 왜 다시 필요해지는지를 생각하게 만든 자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