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를 다시 넘어서자 인도·인도네시아·필리핀의 통화 가치가 일제히 사상 최저 수준으로 밀렸다.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나라들일수록 에너지 가격 급등의 충격을 크게 받는 구조여서, 외환시장 불안이 아시아 전반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30일 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과 야후파이낸스에 따르면 이날 오후 미국 달러 대비 인도 루피 환율은 94.91루피, 인도네시아 루피아 환율은 1만7천345루피아, 필리핀 페소 환율은 61.40페소를 기록했다. 세 나라 통화 모두 달러 대비 환율이 역대 최고치로 올라갔다는 뜻인데, 이는 그만큼 자국 통화 가치가 약해졌다는 의미다. 환율 상승은 수입 물가를 끌어올리는 만큼, 이미 높은 에너지 비용 부담을 안고 있는 국가들에는 물가와 성장 모두에 부담이 된다.
배경에는 중동발 공급 불안이 있다. 영국 시간 전날 런던 ICE선물거래소에서 6월물 브렌트유는 장중 한때 배럴당 126.41달러까지 치솟으며 2022년 6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나타냈다. 뉴욕상품거래소의 6월물 서부텍사스산원유(WTI)도 한때 110.93달러를 찍었다. 원유 가격이 오르면 석유를 해외에 의존하는 아시아 국가들은 더 많은 달러를 들여 에너지를 사와야 하고, 이는 무역수지와 외환 수급을 동시에 압박한다. 결국 통화 약세와 물가 상승이 맞물리는 전형적인 악순환이 나타나기 쉬운 환경이 만들어진 셈이다.
시장에서는 특히 동남아 통화의 취약성을 주목하고 있다. 동남아 투자회사 알파 빈와니 캐피털의 설립자 아슈윈 빈와니는 블룸버그에 대부분의 아시아 통화가 구조적으로 불리한 여건에 놓여 있다며, 그중에서도 루피아와 필리핀 페소가 가장 취약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휴전 교착, 호르무즈해협의 이중 봉쇄, 급등하는 인플레이션 같은 위험 요인이 겹치면서 아시아 통화가 쉽게 안정을 찾기 어렵다고 봤다. 특히 중동의 긴장이 더 고조돼 휴전 상태마저 흔들리면, 에너지 가격 급등이 소비 둔화와 경기 위축으로 이어지는 침체의 악순환이 촉발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내놨다.
각국 중앙은행도 대응에 나서고 있다. 인도중앙은행(RBI)은 정유사 전용 달러 스와프 창구를 열어 달러 조달 부담을 덜어주고, 역외 루피 거래 상품 공급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외환시장 안정을 시도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중앙은행(BI)은 루피아 방어를 위해 국내외 시장 개입을 강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고, 필리핀중앙은행은 물가를 잡기 위한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을 시사했다. 다만 국제 유가가 높은 수준에서 오래 머물면 중앙은행의 단기 처방만으로는 통화 약세와 물가 압력을 동시에 제어하기 쉽지 않다. 이 같은 흐름은 중동 정세와 원유 공급 상황이 진정되느냐에 따라 갈리겠지만, 당분간 아시아 신흥국 금융시장의 변동성을 키우는 요인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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