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암호화폐 정책 싱크탱크 코인센터(Coin Center)의 피터 반 발켄버그 사무총장이 최근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CLARITY Act를 통과시키려는 목적은 이 행정부를 믿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음 행정부를 구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암호화폐에 유례없이 우호적인 지금, 업계가 입법에 사활을 거는 이유를 이 한 문장이 설명한다.
법은 행정부보다 오래 산다. 행정부의 의지는 선거 결과에 따라 하루아침에 뒤집힐 수 있지만, 의회를 통과한 법률은 다음 정권도 함부로 건드리기 어렵다. 암호화폐 업계가 지금 CLARITY Act 통과에 집착하는 것은 트럼프를 믿어서가 아니라, 트럼프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이 법안을 둘러싼 논쟁의 본질이다.
CLARITY Act는 미국 내 디지털자산에 대한 연방 규제 체계를 처음으로 법제화하는 법안이다.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사이에 걸쳐 있던 암호화폐의 관할 경계를 법으로 확정하고, 기업들이 어떤 규제 기관의 감독을 받아야 하는지 명문화한다. 지난해 7월 하원을 초당적 다수결로 통과했다. 그러나 이후 8개월째 상원 은행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발목을 잡은 것은 스테이블코인 이자 지급 조항이다. 달러에 가치를 연동한 디지털 화폐인 스테이블코인을 고객이 플랫폼에 맡길 경우 이자나 리워드를 지급할 수 있느냐는 문제다. 미국 은행권은 이를 전통 은행 예금을 잠식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전면 금지를 요구하고 있다. 스탠다드차타드 분석에 따르면 이자 지급이 허용될 경우 2028년까지 최대 5,000억 달러의 예금이 은행에서 크립토 플랫폼으로 이동할 수 있다. 은행권이 물러서지 않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암호화폐 업계 역시 양보할 수 없다. 코인베이스의 스테이블코인 관련 매출은 2025년 한 해 13억 5,000만 달러로 전체 매출의 20%에 달한다. 브라이언 암스트롱 코인베이스 최고경영자(CEO)는 현재 초안대로라면 법안을 지지할 수 없다고 공개 선언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직접 개입해 "은행들이 CLARITY Act를 볼모로 잡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압박했다. 이 발언은 트럼프가 암스트롱과 비공개 면담을 가진 직후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은 타결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코인베이스 최고법무책임자(CLO) 폴 그린월은 이번 주 "협상이 매우 근접해 있다"고 밝혔고, 상원 은행위는 4월 말 조문 심의 재추진을 목표로 막판 조율 중이다. 그러나 법안이 대통령 서명에 이르기까지는 상원 은행위 심의, 본회의 표결, 하원과의 조문 조율 등 다섯 단계가 순차적으로 남아 있다. 11월 중간선거 전에 처리하려면 5월을 넘길 수 없다. 그 시한을 놓치면 이 법안은 수년간 다시 논의 테이블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다.
규제의 공백은 언제나 시장을 불안하게 만든다. 법이 없으면 다음 행정부가 어떤 방향을 선택하든 막을 근거가 없다. 지금 미국 암호화폐 업계가 CLARITY Act에 사활을 거는 것은 단순한 이해관계의 충돌이 아니다. 호의적인 지금 이 순간을 법으로 고정해두지 않으면, 다음 정권에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냉정한 계산이다. 한국 역시 디지털자산 기본법 논의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법제화가 단순한 규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미국의 사례는 새삼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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