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렛팩커드엔터프라이즈(HPE)가 마침내 미국 법무부(DoJ)와 반독점 소송을 합의하며 주니퍼 네트웍스(JNPR) 인수를 본격화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번 인수는 140억 달러(약 20조 1,600억 원) 규모로, 인공지능 기반 네트워킹 분야에서 시스코(CSCO)에 맞설 새로운 강자가 등장하게 됐다.
미국 법무부는 지난 1월 이 거래가 무선 네트워킹 시장의 경쟁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며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HPE와 주니퍼는 각각 미국 내 무선 네트워크 장비 시장에서 2위와 3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양사가 합병할 경우 1위 업체인 시스코와 직접적인 경쟁 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최근 캘리포니아 북부 연방지방법원에 제출된 합의안에는 두 회사가 일부 핵심 자산을 양도하고 소스코드를 경쟁사에 공개하는 조건이 포함되면서 사실상 정부 측 우려를 해소하게 됐다.
이번 합의에 따라, HPE는 자사의 중소기업용 무선 네트워킹 사업부 ‘인스턴트 온(Instant On)’을 매각해야 하며, 주니퍼의 인공지능 네트워크 운영 플랫폼인 ‘미스트(Mist) AIOps’의 소스코드를 제3자에게 영구적이고 비독점적인 조건으로 라이선스하도록 강제된다. 이 라이선스에는 지원기간 동안 필요 시 인력 전환도 포함된다.
주요 자산 중 하나로 꼽히는 ‘미스트 AIOps’는 HPE가 이번 인수를 추진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법무부는 해당 기술의 공개를 통해 타 경쟁업체들도 동등한 첨단 기술에 접근할 권리를 갖게 됨으로써 공정경쟁을 촉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HPE 측은 성명에서 “주니퍼의 AIOps 기술 접근을 일부 허용하는 수준”이라고 표현하며 핵심 기술의 독점 확보는 여전히 가능하다는 입장을 시사했다. 하지만 동시에 ‘인스턴트 온’ 브랜드와 관련된 모든연구개발(R&D) 자산, 소프트웨어, 지적재산권, 고객지원 부서 역시 180일 내에 미 법무부가 승인한 제3자에게 매각해야 하는 부담도 짊어지게 됐다.
HPE CEO 안토니오 네리(Antonio Neri)는 합의에 대해 “이번 결정은 고객과 주주에게 약속한 인수 효과를 그대로 제공하는 동시에 글로벌 네트워크 시장의 경쟁 환경도 보장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HPE 아루바와 주니퍼의 결합은 보안과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차세대 네트워크 솔루션을 제공하며, AI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및 서비스 제공 부문에서 HPE의 성장을 가속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니퍼 최고경영자 라미 라힘(Rami Rahim) 역시 이번 합의를 환영하며 “하이브리드 클라우드와 AI 인프라 구축을 위한 완전하고 안전한 네트워킹 솔루션을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대한 진전”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인수는 단순한 시장점유율 확대 이상으로,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인 고성능 네트워크를 무기로 삼아 클라우드와 데이터센터 전반에서 입지를 넓히겠다는 HPE의 전략적 승부수다. 네리는 지난해 HPE 디스커버 컨퍼런스에서 “AI 시대에는 반도체 못지않게 네트워크 인프라가 중요해지는 시대”라며 이 같은 방향성을 예고한 바 있다.
스마트 인프라의 핵심을 인공지능 기반 네트워킹으로 보는 관점 아래, HPE와 주니퍼 간의 결합은 AI 워크로드에 최적화된 차세대 네트워크 아키텍처를 선보이는 출발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AI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구글(GOOGL), AWS, 마이크로소프트(MSFT)가 점점 더 중요한 고객이 되어가고 있는 가운데, 양사의 협력이 이들을 겨냥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