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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i(탈중앙화 금융)는 지금 암호화폐 생태계의 근간을 떠받치는 핵심 인프라다. 디파이 플랫폼에 묶여 있는 자산 총액(TVL, Total Value Locked)은 2025년 5월 현재 1,000억 달러를 넘어서고 있으며, 이는 전체 블록체인 활동의 절반 이상이 DeFi와 직접 연관돼 있음을 의미한다. 거래소, 대출, 자산 운용, 파생상품 등 전통 금융의 거의 모든 기능이 블록체인 위에서 자동으로 실행되고 있다.
이제는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이 이 복잡한 금융 활동의 판단과 실행을 맡고 있다. 지갑이 스스로 투자 결정을 내리고, AI가 DAO(탈중앙화 자율조직)의 자금을 굴리는 구조는 이미 확산됐다. 이는 단순한 기술 융합이 아니다. 금융 시스템의 주체와 책임 구조 자체를 바꾸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하지만 이 전환은 블록체인의 기본 설계와 충돌한다. 블록체인은 모든 데이터가 공개되는 구조다. 투명성이 곧 신뢰였다. 그러나 AI 에이전트가 주체가 되는 순간, 이 투명성은 약점이 된다. AI의 판단 기준, 전략 로직, 실행 조건이 온체인에 그대로 기록될 경우, 모방과 선점 공격(front-running)의 위험은 물론, 전체 시스템이 획일화되는 ‘집단 사고(hive mind)’ 가능성도 커진다. 예측 가능한 인공지능은 더 이상 ‘지능’이라 부를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주목받는 것이 ‘비공개 두뇌(Private Brain)’ 개념이다. 판단의 과정은 감추고, 결과만 블록체인에 기록하는 방식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핵심 기술이 바로 TEE(신뢰 실행 환경, Trusted Execution Environment) 이다. TEE는 CPU 내부의 격리된 영역에서 연산을 수행하며, 외부 접근을 원천 차단한다. AI는 이 공간 안에서 전략을 수립하고, 블록체인은 그 결과만 받아 정당성을 검증한다.
해외에서는 이미 이 흐름이 실용 단계에 진입했다. Oasis Labs는 TEE 기반 AI 연산 플랫폼을 구축했고, Secret Network는 입력값과 로직을 숨긴 상태로 스마트 계약을 실행한다. Cartesi와 ARPA도 연산 은닉 기술을 통해 ‘보이지 않는 판단, 검증 가능한 결과’의 구조를 실현 중이다.
그러나 국내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제도적 준비가 전무하다. 디지털자산법, 전자금융거래법 어디에도 AI 에이전트의 법적 지위나 책임 구조에 대한 정의가 없다. TEE, MPC, ZK(영지식증명) 등 핵심 기술도 여전히 제도 바깥에 머물러 있다. 혁신은 속도를 내고 있는데, 법과 제도는 과거의 틀에 갇혀 있다.
이제는 방향을 바꿔야 한다.
첫째, 인공지능 에이전트의 법적 지위와 책임 구조를 명확히 해야 한다.
둘째, TEE와 같은 연산 은닉 기술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안전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특례 조항과 기술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셋째, 기술의 신뢰성을 검증할 수 있는 ‘신뢰 연산 인증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넷째, 국민연금·공공데이터·에너지 거래 등 실제 산업에 AI 에이전트를 시험 적용할 수 있도록 디지털 샌드박스를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DeFi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암호화폐 생태계를 실질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주력 시스템이며, 그 안에서 AI 에이전트는 ‘다음 진화’를 주도하고 있다.
기술은 이미 ‘보이지 않는 판단’을 가능케 했다. 이제는 그 판단을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하다. 신뢰는 더 이상 보이는 것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아도 증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강한 신뢰다.
그리고 그 신뢰 위에서만, 대한민국은 디지털 주권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