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회사가 고객 정보를 폭넓게 모으는 대신 필요한 자격만 암호기술로 확인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헤스터 피어스(Hester Peirce)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은 금융 프라이버시를 예외가 아닌 기본값으로 두자는 견해를 밝혔다. 이는 SEC의 새 규정이나 공식 방침은 아니다.
피어스 위원은 9월 23일 뉴욕에서 열린 증권산업금융시장협회(SIFMA) 디지털자산 콘퍼런스 연설에서 “미국인은 보안과 프라이버시를 모두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SEC가 공개한 연설문은 해당 발언이 피어스 개인의 견해이며 SEC나 다른 위원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논점은 고객확인(KYC)과 자금세탁방지(AML) 절차에서 금융회사가 수집·보관하는 정보의 범위다. 피어스 위원은 신원과 거래 자료를 광범위하게 축적하면 정부나 민간 주체가 정보를 잘못 다루거나 악용할 가능성도 커진다고 주장했다. 대안으로 속성 기반 디지털 자격증명과 영지식증명을 제시했다.
영지식증명은 원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특정 사실이 참임을 증명하는 암호기술이다. 이를 활용하면 나이·시민권·제재 대상 여부 같은 조건을 확인하면서 이름이나 주소 등 근거 정보는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피어스 위원의 제안은 KYC·AML 절차를 없애기보다 규제 준수에 필요한 사실을 확인하고 개인정보 수집을 줄이는 데 초점을 둔다.
다만 이 기술이 기존 KYC·AML 의무를 어디까지 충족할 수 있는지는 구체적인 규칙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피어스 위원은 2025년 8월 4일 버클리 연설에서도 개인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자격 요건을 검증하는 영지식증명의 활용 가능성을 언급했다.
공개 블록체인의 거래 기록은 영구적으로 남고 누구나 확인할 수 있으며, 수사기관도 분석할 수 있다. 피어스 위원은 개인정보 보호를 강화하더라도 거래 흐름을 추적할 가능성까지 없애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거래 기록의 투명성과 개인 신원 정보의 노출을 구분해야 한다는 취지다.
SIFMA는 디지털자산 시장에서 투자자 보호와 시장 무결성, 공정한 경쟁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 토큰화 시장의 규제 준수를 강조하는 업계 요구와 개인정보를 기본값으로 보호하자는 피어스 위원의 제안은 제도 설계에서 함께 고려될 사안이다. SIFMA의 콘퍼런스 정리 글은 피어스 위원의 제안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이나 공식 답변은 아니다.
피어스 위원은 10월 2일 SEC를 떠났다. SEC는 그가 2018년부터 위원으로 재직했고 디지털자산 혁신을 옹호했다고 밝혔다. 금융 프라이버시를 규제 준수와 양립할 수 있는 설계 과제로 제시한 이번 연설은 개인 견해로 남았다.

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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