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조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 수립된 미국 반도체 산업 지원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면서, 총 74억 달러 규모의 관련 예산 운용이 중단될 위기에 놓였다. 미국 내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위해 마련된 이 기금의 사용 방식이 바뀌면서, 업계 전반에 혼란이 확산되고 있다.
바이든 전 행정부는 반도체 연구개발(R&D)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국립반도체기술센터(National Semiconductor Technology Center) 운영을 목적으로 민간 비영리단체 냇캐스트(Natcast)를 설립한 바 있다. 삼성전자, 인텔, 엔비디아 등 200여 개 글로벌 기업이 참여한 이 단체는 반도체 인재 육성, 첨단 공정 연구, 지역 인프라 지원 등을 추진해왔고, 총 74억 달러에 달하는 연방 기금을 배정받았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한 후 상무부는 냇캐스트에 대한 예산 지원을 전면 철회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이 단체를 ‘정치적으로 편향된 창구’로 규정하며,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연방 법무부의 새로운 유권해석을 들어 자금 회수에 나섰다. 이에 따라 냇캐스트는 인력과 조직 운영 전반에 타격을 입었으며, 약 110명의 직원 중 90% 이상이 해고 통보를 받은 상태다.
예산 회수로 인해 당초 지원을 약속받은 주요 반도체 프로젝트들도 좌초 위기에 처했다. 예컨대 애리조나 주립대에 예정된 11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R&D 시설, 뉴욕 올버니 지역에 건설 예정이던 첨단 나노 기술 단지 등은 사업 추진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상무부는 기금의 사용 방향은 유지하되, 보조금 수혜 대상은 처음부터 다시 선정하겠다는 입장이다.
업계는 이 같은 조치에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인텔, IBM, AMD 등 주요 기업들은 상무부 관계자들과 접촉해 각자 자사의 프로젝트가 지원 대상에 다시 포함될 수 있게 노력하고 있지만,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히는 데에는 매우 신중한 모습이다. 행정부의 눈 밖에 날 경우 기업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깔려 있는 것이다.
정치권 일각과 업계 내부에서는 이번 조치가 기금의 정치적 재배분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 측근들이 정책 결정 기구에 다수 포함되면서 기금 분배의 중립성과 투명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보조금 지급의 대가로 기업 지분을 요구할 가능성도 언급한 바 있어, 과도한 시장 개입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이 같은 흐름은 향후 미국 반도체 산업정책이 정권에 따라 크게 출렁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초당적 합의로 만들어진 반도체법조차 정치 논리에 따라 흔들릴 수 있다는 점에서, 업계는 장기 전략 수립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 내 반도체 공급망 복원이 정치적 변수에 좌우되면서, 글로벌 기업들의 대응 전략도 다시 조정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