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원 은행위원회가 디지털자산 시장구조 법안인 CLARITY Act를 15대9로 가결했다. 공화당 전원에 민주당 루벤 갈레고, 앤젤라 올소브룩스 의원이 가세했다. 엘리자베스 워런 의원 등 강경파가 반대했지만 법안은 본회의로 직행한다. 미국의 암호화폐 규제 논쟁은 더 이상 구호가 아니다. 입법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이 법안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암호화폐에 우호적인가, 적대적인가’가 아니다. 이름 그대로 CLARITY, 즉 명확성이다. 무엇이 증권이고 무엇이 상품인가. 증권거래위원회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의 관할은 어디서 갈리는가. 거래소·브로커·커스터디·디파이는 어떤 책임을 지는가. 집행에 의존하던 규제를 법률 체계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명확성은 업계에 주는 특혜가 아니다. 책임의 출발점이다. 법 밖에 있는 한 부실 프로젝트도, 시세조종 세력도, 해외 불법 자금도 회색지대를 활용한다. 법 안으로 들어오면 등록하고, 공시하고, 고객자산을 분리하고, 자금세탁방지 의무를 진다. 미국이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없앨 수 없다면 규율하라는 것이다.
■ 한국은 어디까지 와 있나
한국도 첫걸음은 뗐다. 2024년 7월 시행된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은 이용자 자산 보호와 불공정거래 금지, 금융당국의 감독권을 담았다. 분명한 진전이다. 그러나 이 법은 거래 이후의 피해 방지에 머문다. 발행, 상장, 공시, 유통량, 재단 책임, 스테이블코인, 디파이 — 시장의 골격에 해당하는 문제들은 모두 공백으로 남아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가상자산 시장 중 하나다. 그러나 그 시장의 기본 질서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5년 말 국내 거래가능 이용자 계정은 1113만 개, 원화예치금은 8조1000억 원이었다. 같은 기간 일평균 거래규모는 5조4000억 원으로 줄었고, 거래소 영업손익은 3807억 원으로 38% 감소했다. 시가총액은 87조2000억 원이었다. 이용자는 늘었지만 시장의 체력은 약해지고 있다.
■ 92%가 '무응답' 시장
더 심각한 것은 불투명성이다. 토큰포스트 'TOKEN KOREA WATCH'가 국내 5대 원화거래소 상장 프로젝트를 전수조사한 결과 대상은 637개였다. 5개 거래소 모두에 상장된 종목은 32개에 불과했다. 일반 투자자의 눈높이에서 공식 웹사이트와 공개 채널, 이메일을 통해 직접 연락한 결과, 답신이 온 곳은 51곳, 8%에 그쳤다. 이메일 주소조차 없는 곳이 140곳을 넘었다.
이것은 홍보 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금융시장의 기본이 무너진 풍경이다. 자기 돈을 넣은 프로젝트에 질문 한 통 보낼 수 없는 시장을 정상이라 할 수 없다. 92%가 침묵한다. 투자자는 돈을 냈는데, 상대방은 이름표도 초인종도 없다.
특수성은 사태를 더 무겁게 한다. 토큰포스트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주간 가상자산 거래량은 260억 달러, 전 세계의 약 30%다. 국내 개인투자자의 알트코인 비중은 85%에 이르고, 비트코인은 9%, 이더리움은 6%에 그쳤다. 세계에서 알트코인을 가장 적극적으로 거래하는 시장이 한국이다. 그 알트코인의 약 40%가 사상 최저치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
상장폐지의 그림자는 이미 짙다. 2025년 하반기 원화마켓 거래중단은 54건으로 전기 대비 50% 늘었다. 사유 1위는 '프로젝트 위험'이었다. 사업 지속성에 문제가 있거나 재단과 연락이 끊긴 경우가 여기에 포함된다. 답하지 않는 프로젝트가 상장폐지로 가는 길은 우연이 아니다. 투자자는 늘 가장 마지막에 안다. 이것이 한국 코인 시장의 고질병이다.
■ 한국에도 '시장구조법'이 필요하다
국회와 금융당국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이름이 무엇이든 좋다. 한국판 가상자산 시장구조법을 세워야 한다.
첫째, 디지털자산을 증권형·결제형·상품형·유틸리티형으로 구분하고 감독 기준을 명문화해야 한다. 둘째, 발행인과 재단에는 백서가 아니라 법적 책임이 따르는 공시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 셋째, 원화거래소 상장 프로젝트는 한국 투자자가 접근 가능한 공식 연락 채널, 한국어 공지, 유통량 변동, 락업 해제 일정, 재단 보유량, 핵심 인력과 소재지를 의무 공개해야 한다.
넷째, 거래소의 책임이다. 상장은 거래소의 영업 행위이자 투자자에게 보내는 신뢰 신호다. 수수료와 거래량의 이익을 챙기면서, 프로젝트가 사라지면 "중개만 했다"고 발 빼는 행태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상장 심사, 상장폐지 기준, 유통량 점검, 연락 가능성 확인을 의무화해야 한다. 답하지 않는 프로젝트는 경고하고, 계속 침묵하면 퇴출해야 한다. 시장은 친절할 필요는 없지만, 정직해야 한다.
다섯째, 스테이블코인이다. 이것은 단순한 코인이 아니라 결제망이다. 준비자산·상환권·회계감사·은행 연계·외환관리 기준 없이 허용하면 금융 불안의 통로가 된다. 그러나 기준 없이 막아두면 원화 기반 디지털 결제 인프라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에 자리를 내준다. 산업 문제가 아니다. 통화 주권의 문제다.
여섯째, 디파이다. '코드'가 아니라 '통제권'을 기준으로 봐야 한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무조건 규제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탈중앙이라는 이름 뒤에서 실제로 수수료를 받고, 운영 권한을 행사하며, 고객자산 흐름을 통제하는 주체까지 방치해서는 안 된다. 미국 CLARITY Act가 디파이 규제에서 코드가 아닌 통제에 초점을 맞춘 이유다.
■ 민간이 먼저 움직이고 있다
민간의 역할도 중요하다. 토큰포스트가 시작한 'TOKEN KOREA WATCH'는 바로 이 공백을 겨냥한다. 팀이 실재하는지, 투자자와 소통하는지, 공식 채널이 살아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응답하지 않는 프로젝트도 결과에 포함된다. 무응답 자체가 투자자 판단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토큰포스트가 함께 추진하는 '디지털 자산 자율 공시 기준안'도 주목할 만하다. 토큰 공급 일정, 락업 계획, 내부자 보유량, 시장조성자 계약, 유통 구조, 법인·재단 소재지, 재무 정보, 핵심 인력, 공식 커뮤니케이션 채널 등 12개 항목이 공개 기준으로 제시된다. 입법을 기다리는 동안 시장이 스스로 최소한의 신뢰선을 긋겠다는 시도다.
그러나 자율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자율은 성실한 주체에게만 작동한다. 사라질 작정인 프로젝트, 유통량을 숨기는 재단, 내부자 물량을 털고 떠나는 팀에 자율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법이 필요하다. 민간이 기준을 만들고, 거래소가 심사에 반영하며, 금융당국이 법적 의무로 끌어올리는 — 이 3단 구조가 한국식 해법이어야 한다.
■ 5년 후의 풍경이 달려 있다
지금 법을 세우면 한국은 달라질 수 있다.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토큰증권, K콘텐츠 IP 토큰화, 게임·엔터테인먼트 포인트, AI 에이전트 결제 인프라가 국내 제도 안에서 성장할 수 있다. 빠른 이용자 채택, 강한 콘텐츠 산업, 활발한 개인투자 문화, 우수한 인터넷 인프라가 모두 한국의 자산이다. 규칙만 제대로 세우면 아시아 디지털 금융의 실험장이 된다.
그러나 지금처럼 미루면 5년 뒤 풍경은 뻔하다. 좋은 프로젝트는 미국·싱가포르·홍콩·일본으로 떠난다. 한국에는 원화마켓의 단기 거래, 상장폐지의 공포, 무응답 재단, 개미투자자의 손실만 남는다. 그때 가서 "왜 한국에는 글로벌 디지털자산 기업이 없는가" 물어봐야 늦다. 규칙을 세우지 않은 나라에 산업은 머물지 않는다.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 1단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발행·공시·상장·유통·보관·스테이블코인·디파이·법인 참여를 포괄하는 2단계 시장구조 입법을 서둘러야 한다. 특히 원화거래소 상장 프로젝트의 공시와 소통 의무는 즉시 제도화해야 한다. 이메일 주소조차 없는 프로젝트가 한국 투자자의 돈을 받아 가는 일은 더 이상 허용될 수 없다.
CLARITY는 미국 법안의 이름이지만, 한국 시장에도 필요한 단어다. 명확해야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책임을 물어야 신뢰가 선다. 신뢰가 있어야 산업이 자란다. 미국은 이미 명확성을 법으로 쓰기 시작했다. 한국은 여전히 침묵하는 프로젝트들을 거래소 화면에 올려두고 있다.
시장은 오래 기다리지 않는다. 투자자는 더더욱 기다릴 이유가 없다.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명확하게 정하라. 공개하게 하라. 답하게 하라. 그래도 응하지 않으면 퇴출하라. 그것이 투자자를 지키는 길이고, 산업을 살리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