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당국이 역대 최대 규모의 암호화폐 압수 수사에 나서면서, 약 2억 2,500만 달러(약 3,128억 원)에 달하는 테더(USDT) 자금이 인신매매와 허위 암호화폐 거래소를 통해 세탁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투자 사기가 아닌, 국제적 인신매매와 조직범죄로 얽혀 있는 공범 구조를 상세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미국 비밀경호국은 이 자금을 ‘블록체인 기반 세탁 조직’의 소유로 규정하고, 모든 계좌를 동결 조치했다. 수사는 암호화폐 거래소 OKX의 내부 보고에서 시작됐다. OKX는 144개의 이상 거래 계좌를 당국에 신고했고, 이 단서는 수백 명이 피해를 입은 글로벌 사기 조직의 실체를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자 434명 중 약 60명은 직접 조사를 받았으며, 이들이 입은 피해 금액만 약 1,900만 달러(약 264억 원)에 달한다.
일부 피해자는 평범한 투자자가 아닌 사회 지도층 인사들도 포함돼 충격을 더했다. 예를 들어, 미국의 한 시중은행 CEO인 션 헤인스(Shan Hanes)는 자신이 대표로 있던 하트랜드 트라이스테이트 뱅크에서 약 4,700만 달러(약 653억 원)를 횡령해 사기 사이트에 투자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기 조직은 단순한 온라인 피싱이 아닌, 동남아시아 전역의 인신매매 네트워크와 연결돼 있었다.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필리핀에 구축된 이른바 ‘사기 공장(compounds)’에서는 강제로 포획된 인력이 가짜 연인 행세를 하거나 투자 컨설턴트로 위장해, 데이팅 플랫폼과 메신저 앱을 통해 피해자에게 접근했다.
모든 기술적 단서는 필리핀으로 이어졌다. OKX에서 신고된 이상 계좌 144개 모두 필리핀 IP를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며, 이들 자금의 소유를 주장한 필리핀 내 복수의 법인 가운데 하나는 이미 범죄 혐의로 주목받은 이력이 있는 ‘인피니웹 테크놀로지(Infiniweb Technology Inc.)’였다. 이 회사는 인신매매 및 유괴 연루 의혹을 받은 샤이온웨이(Xionwei Technologies)와 연결돼 있으며, 이 조직은 불법 도박과 전 필리핀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와도 연계돼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번 압수 사안은 단순한 사기 사건을 넘어, 암호화폐가 어떻게 시스템적 착취와 국제 범죄의 도구로 악용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과거엔 투자 리스크 차원에서만 접근됐던 암호화폐 사기가, 이제는 인권 침해와 긴밀히 교차하는 복합 범죄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규제 기관과 수사당국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약 3,128억 원에 달하는 압수 규모보다 더 강력한 경고는 바로 ‘암호화폐가 더 이상 치외법권이 아니라는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