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 KL)에 와 있다. 이번 방문은 Asia School of Business(ASB)의 Dr. Pieter E. Stek의 초청으로 이루어졌다. ASB는 미국 MIT Sloan School of Management와 공동으로 MBA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경영대학원으로 잘 알려져 있다. Stek 박사는 ASB 내에서 Research Partnership & Engagement, Center for Technology, Strategy & Sustainability (CTSS) 등을 이끌고 있는 네덜란드 출신 학자이다.
KL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시기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다. 아마도 2010년 이전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이후 말레이시아가 급격히 발전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채널을 통해 자주 접하긴 했었다. 특히, KL은 글로벌 서비스로 성장한 Etherscan과 CoinGecko가 시작된 곳으로, 웹3 온체인 분야에서 주목받는 도시다. 그래서 나도 평소에 이 도시에 관심이 많았다. 더 최근에는 Binance 창립자 Changpeng Zhao(CZ)가 지난 4월 말레이시아 총리와 면담하기 위해 방문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이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크립토 및 웹3 산업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직접 체감할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방문 이틀째, KL 중심가에서 점심 식사를 하던 중, 옆 테이블에서 'NFT'라는 단어가 유난히 자주 들려왔다. 무심결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한 젊은 청년이 Solana 기반의 NFT 프로젝트에 대해 온라인 컨퍼런스를 통해 상대방에게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상대방은 그 내용을 통역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청년의 고객은 중국계인 듯했다. 약 30분간의 회의가 끝난 후, 비즈니스가 성사된 듯 그는 기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오늘은 Pieter가 My Fintech Week 2025 행사에서 패널리스트로 참여한다고 하여 함께 행사장에 다녀왔다 (https://youtube.com/shorts/6hMu7hQQHHY?feature=shared). 이 행사는 말레이시아 중앙은행이 주최하는 연례 핀테크 행사로, 금융 혁신, 지속가능성, 포용성을 주제로 다양한 세션과 글로벌 연사들이 참여한다. 업계 리더, 정책 입안자, 스타트업이 모여 핀테크의 미래를 논의하는 플랫폼이다. ASB는 말레이시아 금융 클러스터에 자리잡고 있어 대학과 산업 간의 협력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Tech-Powered Climate Finance” 패널 세션을 참관했다. 이 세션은 MOODY’S ESG 솔루션 전문가 Yiwen He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SME Bank의 Adman Hassan, ASB의 Pieter Stek 박사를 포함해 총 6인의 패널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급변하는 기후 변화 속에서 금융이 직면한 문제들을 기술을 통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 논의했다. 예를 들어, 기후 리스크에 대한 사회적 비용이 종종 제대로 책정되지 않는 현실을 지적하며, 이러한 왜곡을 바로잡는 데 기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심도 깊게 토론했다.
또한, 데이터와 디지털 혁신이 이 분야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도 중요한 논점으로 다뤄졌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공지능과 블록체인, 웹3 기술이 기후 금융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였다. 한 토론자는 기후 관련 데이터를 다루기 위해 생성형 인공지능 기반의 서비스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금융 가치 사슬 전반에서 오염 또는 친환경 행동을 기록하고 모니터링하는 데 있어 AI가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강조했다.
Pieter는 유럽의 산림 벌채 규제(EUDR)가 그 취지와는 달리, 시장의 낮은 투명성으로 인해 말레이시아의 소규모 팜유 재배자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로 인해 이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EUDR(European Union Deforestation Regulation)은 유럽연합(EU)이 전 세계적인 산림 벌채와 황폐화를 억제하기 위해 2023년 6월에 도입한 법적 규제로, EU 시장에 유통되는 특정 상품들이 산림 벌채 없이 생산되었음을 증명하도록 요구한다.
그는 핀테크와 블록체인 기술이 이러한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며, 특히 시스템 아키텍처가 대형 금융기관에 의해 독점적으로 개발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거버넌스 및 기술 시스템 설계 과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필요하다면 특정 구조를 거부할 수 있는 권한도 보장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기후 금융 분야에서의 웹3 핀테크 서비스 역시 소규모 참여자들이 배제되지 않도록, 탈중앙화된 접근 방식을 통해 포용성이 담보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Stek 박사와의 인연은 벌써 15년에 가까워졌다. 그가 네덜란드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ASB에 자리를 잡았을 때, 나는 다소 의아했다. 하지만 이번에 직접 그의 연구 환경을 보고 KL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그의 선택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의 ‘melting pot’으로, 인종적·문화적 다양성이 풍부한 나라다. Stek 박사는 이곳에서 중앙집중적 시스템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며, 기술 중심의 핀테크 서비스가 사회적 맥락을 간과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꾸준히 제기해 왔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소셜 미디어를 포함한 새로운 디지털 기술 시스템이 오히려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을 통제하고 있다는 점도 그는 경계한다.
핀테크 분야에서도, 대기업이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웹3 플랫폼을 독점적으로 개발하고 사용자 경험을 조작할 경우, 이 기술이 본래 지향했던 탈중앙화의 가치는 퇴색될 수 있다. 특히 Stek 박사가 강조하듯, 기술 시스템이 소규모 사용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도록 설계하는 것은 핀테크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다. 이는 말레이시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이며, 이에 대해 학계와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앞으로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