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인공지능 반도체 업체인 엔비디아가 중국 시장을 겨냥해 개발한 최신 AI 칩이 현지 주요 고객사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능 대비 높은 가격과 경쟁 제품의 존재로 인해, 신규 제품에 대한 수요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미국 정부의 수출 규제를 피하면서 중국 내 시장을 유지하기 위해 별도의 저사양 칩을 개발해왔다. 대표적인 제품이 최근 출하가 시작된 ‘RTX 6000D’다. 이 칩은 최신 설계 기술인 ‘블랙웰’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하지만, 고성능 메모리인 HBM 대신 성능이 낮은 GDDR 메모리를 탑재했다. 메모리 대역폭도 미국 정부의 규제 기준치인 초당 1.4테라바이트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으로, 규제를 피하면서 최소 요건을 충족했다.

그러나 이러한 절충은 성능 저하로 이어졌고, 주요 기술 기업들 사이에서는 시장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트댄스 같은 대형 테크기업들은 RTX 6000D 대신 더 강력한 AI 학습용 칩인 ‘H20’ 시리즈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RTX 6000D는 성능 측면에서 이전 세대의 RTX 5090보다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가격도 후자보다 2배 비싼 약 970만원에 달한다. 반면 RTX 5090은 비공식 유통 경로인 ‘회색시장’을 통해 여전히 중국 내에서 구할 수 있는 상황이다.

시장 분석가들의 예측과도 엇갈리는 수요가 감지된다. JP모건과 모건스탠리는 RTX 6000D가 하반기 수백만 개 수준으로 생산될 것이라 전망했지만, 실제 구매 수요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는 일부 고객사들이 아예 이 칩의 주문을 포기했다고 전했다.

한편 H20의 후속 모델로 알려진 B30A 역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제품은 보다 성능이 높으면서도 가격 경쟁력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중국 기업들은 미국 정부의 수출 승인이 조속히 이뤄지기를 기다리는 상황이다. 하지만 H20 역시 아직 실제 출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엔비디아가 H20 수출 승인을 확보한 대가로 미국 정부에 매출의 15%를 납부하기로 약속했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행 규정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흐름은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와 중국 기업들의 AI 기술 수요가 불일치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보여준다. 미국 정부가 규제를 지속하는 한 성능과 가격 모두를 만족시키는 제품 설계는 기술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엔비디아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 내 입지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는 향후 미중 기술 패권 경쟁 구도의 중요한 바로미터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