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주요 금융 규제기관 수장들이 암호화폐에 대한 입장을 대폭 선회하며, 정책적·제도적 기반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 최근 필라델피아 연준이 주최한 핀테크 콘퍼런스에서 증권거래위원회(SEC),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등 핵심 기관 수장들이 암호화폐 생태계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강한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시장 참여자들이 우려해온 규제 불확실성이 해소될 단초로 주목된다.
SEC 폴 앳킨스(Paul Atkins)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암호화폐가 증권에 해당하는지를 판별할 수 있는 '토큰 분류 기준(Token Taxonomy)'을 마련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투자계약에 기반한 디지털 자산의 공모를 가능케 하는 새로운 프레임워크를 준비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접근은 기존의 SEC 규제 범위에 암호화폐를 포섭하려는 시도로, SEC가 독자적인 법 해석보다는 정의 기준의 명확화에 집중하고 있다는 신호다.
패널에 함께 참석한 크리스토퍼 월러(Christopher Waller) 연준 이사는 스테이블코인에 대해 더욱 명확한 지지 입장을 내비쳤다. 그는 최근 의회를 통과한 법안이 자신이 주장해온 디지털 결제 수단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사례라고 강조했다. 월러 이사는 “우리는 이제 새로운 연준이며, 기술을 활용해야 한다”며 중앙은행이 더 이상 기술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다.
디지털 달러 프로젝트 창립자인 크리스토퍼 지안카를로는 "AI 시대의 마이크로페이먼트를 구현하는 데 있어 P2P 방식의 결제는 스테이블코인이 유일한 해법"이라며,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향후 메타버스를 비롯한 디지털 세계에서 지배적인 통화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가장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기관은 CFTC다. 캐롤라인 팜(Caroline Pham) CFTC 위원 대행은 백악관 디지털 자산 TF의 권고 사항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이른바 '크립토 스프린트'를 추진 중이다. 그녀는 "우리는 토큰화 기반 시장 인프라로 이동하려 하고 있다"며, 규제를 정비한 후 단속에 나서겠다는 사전 규범 정립 원칙을 반복 강조했다.
FDIC 역시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트래비스 힐(Travis Hill) FDIC 의장 대행은 연내에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를 위한 보험 가이드라인과 신청 절차를 내놓겠다고 밝혔다. 그는 블록체인에 예금을 옮기는 것을 기존 금융체계와 법적으로 동일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설명하며, 이미 여러 대형 은행이 토큰화 플랫폼에 투자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모두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월러 이사는 중앙은행의 결제 시스템 개방이 은행 인가를 취득한 기관에만 허용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는 핀테크와 암호화폐 기업들에게 여전히 장벽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또한 JPMorgan은 핀테크 기업으로부터 한 달에 20억 건에 달하는 데이터 요청이 몰리는 현상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고 있으며, 응답의 87%가 비거래 관련 요청이라는 점에서 소모적인 부하를 초래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기술적 불안정성도 감안해야 한다. 최근 파이낸셜 파트너인 팍소스(Paxos)가 시스템 오류로 300조 달러(약 4경 3,000조 원) 규모의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암호화폐 기반 시스템이 아직까지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단계에 있음을 상기시키는 사례로 작용했다.
이에 대응해 체인링크(Chainlink)의 공동 창립자 세르게이 나자로프는 '시큐어 민트(Secure Mint)' 기술을 통해 이 같은 오류를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해당 기능은 토큰 발행 시점에 유효성을 자동 검증하는 스마트 계약 로직을 포함하고 있어 기술적 보호장치로 주목받고 있다.
정책적 움직임과 기술적 보완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암호화폐 산업은 제도권 진입의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규제기관들이 처벌 중심에서 지원 중심 접근으로 선회하며, 미국의 디지털 금융 인프라가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