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시장이 지루한 박스권에 갇혀 있는 사이, 탈중앙화 영구선물(Perpetual) 거래소들 간의 경쟁은 날로 달아오르고 있다. 특정 코인 가격이 오르거나 내리는 상황과 별개로, 파생상품을 활용한 레버리지 거래가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면서 새로 등장한 플랫폼과 토큰들이 시장의 주인공 자리를 놓고 싸우는 모습이다. 이 글에서는 펄프(perp)가 무엇인지부터 시작해, 최근 경쟁 구도의 변화, 경쟁을 불러온 요인, 그리고 한국에서의 상황까지 종합적으로 짚어본다.
영구선물(perp)의 개념과 매력
먼저 영구선물(perpetual futures, 줄여서 ‘펄프’)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전통적인 선물은 원유나 금 같은 자산을 미래의 특정 시점에 정해진 가격으로 매매하는 계약이지만, 영구선물은 만기가 없다. 2016년 비트멕스(BitMEX)가 처음 도입한 이 상품은 펀딩 레이트(funding rate)라는 메커니즘을 사용해 계약 가격과 현물 가격을 일정 간격마다 맞춘다. 8시간에 한 번씩 영구선물 가격이 현물보다 높으면 롱 포지션 보유자가 숏 포지션 보유자에게, 반대의 경우에는 숏 포지션 보유자가 롱 포지션 보유자에게 지불하는 방식이다.
만기가 없으니 계약을 연장하는 번거로움이 없고 24시간 365일 거래가 가능하며, 증거금을 활용한 레버리지로 자본 활용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이런 장점 덕분에 영구선물은 오늘날 주요 거래소의 전체 파생상품 거래량 가운데 80~90%를 차지할 정도로 핵심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실물을 보유하지 않고 가격 변동성에만 베팅한다’는 특성 때문에 투자자는 소액으로도 높은 노출을 가질 수 있지만, 그만큼 변동성과 청산 위험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최근 불붙은 경쟁과 거대 에어드롭
2025년 가을, 영구선물 탈중앙화 거래소(펄프 DEX)들은 뜻밖의 호황을 맞았다. ASTER와 APEX 같은 토큰은 단기간에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고, Lighter와 Pacifica 같은 플랫폼들은 ‘포인트 파밍’ 열풍 덕분에 거래량이 급증했다. 여기에 Hyperliquid가 실시한 수십억 달러 규모의 HYPE 토큰 에어드롭이 결정적 기폭제가 됐다. 사용자는 플랫폼에서 거래하거나 유동성을 제공하면 포인트를 받는데, 이 포인트가 나중에 토큰으로 교환될 수 있다는 기대가 퍼지며 사용자들은 ‘다음 Hyperliquid’가 될 프로젝트를 찾아 나섰다.

Hyperliquid의 주도권 흔들림
그러나 에어드롭의 후폭풍은 복합적이었다. Aster가 돌풍을 일으키면서 Hyperliquid의 거래량 시장 점유율은 56.1%에서 13.7%까지 쪼그라들었다. 하루 평균 거래량이 91억 달러에 이르는 Hyperliquid에게도 아픈 지표였다. 이러한 수치만 보면 Hyperliquid가 주도권을 잃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표면적인 거래량 지표는 실제 이용자 기반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반론도 많다.
거래량보다 중요한 미결제약정
거래량은 포인트를 얻기 위한 ‘세탁 거래’나 봇 거래로 쉽게 부풀릴 수 있다. 이에 비해 미결제약정(open interest)은 실제로 열린 포지션의 총 가치를 의미하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조작하기가 어렵다. 이 지표를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Hyperliquid는 131억 달러의 미결제약정과 1.61의 미결제약정/거래량 비율을 기록하며 여전히 가장 큰 플랫폼이다. 경쟁사 Lighter는 지난 한 달간 평균 일간 거래량이 53억 9,000만 달러에 달했지만 미결제약정이 13억 7,000만 달러에 불과해 OI/거래량 비율이 0.181이고, Aster는 이 비율이 0.02에 그쳤다.
이러한 숫자는 Hyperliquid의 사용자들이 단순히 포인트를 채굴하려는 단기 이용자가 아닌, 실제로 포지션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투자자가 많다는 의미다. 반대로 Lighter와 Aster의 높은 거래량은 대부분 단기 파밍 수요에 의한 것일 수 있다.
무엇이 변화를 이끄는가
경쟁 구도를 흔드는 요인은 다양하다. 가장 먼저, 막대한 에어드롭이다. Hyperliquid의 HYPE 토큰은 에어드롭 직후 시가 총액이 70억 달러를 넘어섰고, 참가자들은 다음 기회를 찾기 위해 새로운 펄프 DEX에 몰려들었다. 두 번째는 기술적 차별화다. Lighter는 zk롤업을 활용하여 매칭과 청산을 제로 지식 증명으로 검증하고 자산은 이더리움 체인에 보관한다. 이를 통해 자체 체인을 운영하는 Hyperliquid보다 보안과 탈중앙성을 강조했다. Aster는 바이낸스 스마트체인을 기반으로 하여 거래 속도와 비용 면에서 장점을 내세우고, 바이낸스와 창펑자오(CZ)의 후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투자자들의 기대를 받고 있다.
세 번째는 수수료 경쟁이다. Lighter는 메이커와 테이커 모두에게 거래 수수료를 0으로 책정했다. 이는 로빈후드 등장 이후 주식 중개업계가 제로 수수료로 재편된 것과 유사한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무료 수수료 덕분에 거래량을 빠르게 끌어올릴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수익모델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Hyperliquid가 이러한 압박에 대응해 수수료를 낮출지는 아직 미정이지만, 경쟁 구도가 치열해질수록 이용자 입장에서는 수수료 인하가 반가운 소식이다.
마지막으로 사용자 경험과 상장 속도가 중요한 변수가 됐다. Hyperliquid는 다양한 알트코인을 신속하게 상장하며 투자자들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반면, Lighter는 상장 속도가 느리고 인터페이스가 불편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Aster는 아직 토큰 종류가 제한적이지만, 바이낸스의 네트워크를 통해 빠르게 라인업을 늘릴 가능성이 있다.
한국 시장의 규제와 기회
한국은 암호화폐 거래 열기가 뜨거운 지역 중 하나지만, 고위험 파생상품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2021년 ‘특정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 개정으로 가상자산 사업자가 정식 제도권에 편입됐고, 실명계좌 발급과 원화마켓 상장 요건이 마련됐다. 이어 2024년 7월에는 ‘가상자산 이용자보호법’이 시행돼 부당거래와 시세조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고 투자자 보호 장치가 추가됐다. 이러한 규제 환경에서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들은 레버리지 파생상품을 취급하지 않고 있으며, 투자자들은 해외 거래소나 탈중앙화 거래소로 시선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국내에서는 영구선물 거래를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플랫폼이 거의 없지만, 코리아 블록체인 위크(KBW) 같은 행사에서 영구선물 DEX 데이(Perp-DEX Day)가 열리는 등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SNS에는 영구선물 거래를 e스포츠처럼 중계하는 이벤트 영상이 공유되고, 젊은 투자자들이 레버리지 거래 대회를 벌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수익을 노린 과도한 레버리지와 펀딩 레이트 변동성은 큰 손실로 이어질 수 있어, 투자자 교육과 리스크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망과 시사점
지금의 펄프 DEX 경쟁은 2021년 레이어1 블록체인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에도 이더리움이 독점적 지위를 오래 유지할 것처럼 보였지만, 솔라나와 다른 체인들이 등장해 균형을 흔들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역학이 관찰된다. Hyperliquid가 막대한 미결제약정을 토대로 굳건히 버티고 있지만, Lighter와 Aster의 도전은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수수료 무료화와 기술적 차별화 전략이 투자자들의 발길을 끌고 있고, 바이낸스 같은 거대 거래소의 후원은 시장 판도를 단숨에 바꿀 수 있는 요인이다.
투자자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숫자의 본질을 읽는 것이다. 거래량만 보고 플랫폼을 옮기기보다는 미결제약정, 펀딩 레이트, 청산 규모 같은 지표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포인트 파밍과 에어드롭으로 유입된 유동성은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에서는 규제의 공백을 틈타 해외 플랫폼을 이용하는 투자자가 많지만, 리스크에 대한 이해 없이 레버리지 거래에 뛰어드는 것은 위험하다.
결국 영구선물은 만기가 없는 만큼 ‘끝없는 싸움’이기도 하다. 어떤 플랫폼이 오래 버티며 안정적인 생태계를 구축할지, 또는 새로운 혁신이 또 다른 승자를 탄생시킬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플레이어만이 다음 무대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투자자에게는 화려한 수익률보다 냉정한 수치와 규제 환경을 읽는 안목이 더욱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