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7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주목할 만한 기술 문서가 제출됐다. '은행 예금 안정성과 스테이블코인 수익률: 감독 안전 설계 패턴 및 증거 아티팩트(Bank Deposit Stability & Stablecoin Yield: Supervisory-Safe Design Patterns and Evidence Artifacts)'라는 제목의 이 186페이지 분량 문서는, 스테이블코인과 수익형 디지털자산을 어떻게 분류하고 감독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운영 프레임워크를 담고 있다.
이 문서는 SEC 산하 암호자산 태스크포스(Crypto Freedom Task Force)에 제출된 것으로, 기존에 제출된 FCCK(Financial Compliance & Control Kernel) 파일럿 프레임워크의 후속편이다. 정책 제안이 아닌 '비규범적(non-normative) 구현 가이드'를 표방하지만, 그 내용의 구체성과 체계성은 사실상 규제 설계의 청사진에 가깝다.
한국 금융당국이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 시행 이후 2단계 입법(스테이블코인·토큰증권 규제)을 준비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 문서가 던지는 시사점을 짚어본다.
핵심 1: 스테이블코인의 3단계 분류 체계 — "결제인가, 투자인가, 리워드인가"
이 문서의 가장 핵심적인 제안은 스테이블코인 관련 상품을 세 가지 카테고리로 명확히 분류하는 것이다.
카테고리 1(결제형) 은 순수 결제·정산 기능만 수행하는 스테이블코인이다. 준비자산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발행사가 보유하며, 보유자에게는 어떤 수익도 돌아가지 않는다. 현재 USDT, USDC의 기본 구조가 이에 해당한다.
카테고리 2(수익형) 는 보유자에게 이자나 수익률을 제공하는 별도의 금융 상품이다. 결제형 스테이블코인과 법적·운영적·공시적으로 분리되어야 하며, 보유자가 자발적으로 참여(opt-in)하는 구조다. 준비자산 운용 수익, 대출 수익 등이 수익원이 된다.
카테고리 3(리워드형) 은 제3자 파트너십이나 계열사를 통해 간접적 혜택(캐시백, 포인트, 할인 등)을 제공하는 유형이다. 수익의 원천이 외부에 있다는 점에서 카테고리 2와 구별된다.
이 분류 체계가 중요한 이유는, 각 카테고리별로 공시 의무, 준비금 증명, 스트레스 테스트, 감사 대응 수준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문서는 각 카테고리 간 전환을 판단하는 '바운더리 테스트(Boundary Test)' 기준표까지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결제형 스테이블코인의 준비금 수익을 보유자에게 나눠주는 순간, 카테고리 1에서 카테고리 2로 넘어가며 추가적인 규제 의무가 발생한다.
한국에 대한 시사점: 금융위원회가 준비 중인 스테이블코인 규제에서 가장 논란이 될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결제형 스테이블코인에 수익률 제공을 허용할 것인가? 허용한다면 어디까지가 '결제'이고 어디서부터 '투자 상품'인가? 이 문서의 3단계 분류 체계는 한국 규제 설계에 직접 참고할 수 있는 모델이다.
핵심 2: '증거 팩(Evidence Pack)' — 실시간 감사 인프라의 구체적 설계
문서에서 가장 실무적으로 눈에 띄는 부분은 '증거 팩(Evidence Pack)'이라는 표준화된 감사 문서 체계다. 발행사가 규제 당국의 검사에 대비해 사전에 준비하고 유지해야 하는 증빙 자료의 목록, 형식, 해시 검증 방법까지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증거 팩에는 준비금 증명, 수익 배분 내역, 환매 처리 로그, 집중도 보고서 등이 포함되며, 모든 기록은 '불변 로그(Immutable Log)'로 관리되어 사후 변조가 불가능해야 한다. SHA-256 해시 체인을 통해 로그의 무결성을 검증하고, 분기별로 증거 팩 조립 훈련(drill)을 실시하도록 권고한다.
특히 '검사관 쿼리 팩(Examiner Query Pack)'이라는 개념이 주목된다. 규제 당국 검사관이 발행사 데이터를 기술적 마찰 없이 직접 조회할 수 있도록 사전 표준화된 SQL 쿼리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준비금과 수익 프로그램 자금이 섞이지 않았는가?"를 검증하는 쿼리(혼합 감지 쿼리), "상위 10개 보유자의 집중도는 얼마인가?"를 조회하는 쿼리 등이 예시로 포함되어 있다.
한국에 대한 시사점: 한국은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에 따라 가상자산 사업자에 대한 검사 체계를 운영하고 있지만,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에 대한 구체적 검사 기준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이 문서의 증거 팩 체계는 '어떤 자료를 어떤 형식으로 얼마나 자주 제출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 답을 제시한다. 특히 블록체인 기반 불변 로그와 해시 체인 검증이라는 기술적 요소는, 기존 금융기관 검사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감독 방법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핵심 3: 뱅크런 시나리오 대비 — '유동성 게이트'와 '스로틀' 메커니즘
이 문서가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는 부분이 바로 스트레스 상황, 즉 디지털 뱅크런 대응이다. 디지털 환경에서는 전통적 뱅크런과 달리 환매 요청이 수분 내에 대규모로 몰릴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단계별 대응 체계를 설계했다.
24시간 내 미상환 잔액의 15~25%가 환매 요청되면 '오렌지 경보'로 처리 속도를 늦추는 '스로틀(throttle)'이 발동된다. 25%를 초과하면 '레드 경보'로 환매를 일시 정지하는 '게이트(gate)'가 작동한다. 게이트는 최대 7일간 유지되며, 연장 시 감독 당국의 승인이 필요하다.
문서는 실제 스트레스 시나리오까지 상세히 기술한다. 예를 들어 "연준 금리 충격으로 국채 시장 변동성이 확대되고, 3개 기관투자자가 2시간 내 전체 물량의 25%를 환매 요청하는 상황"을 가정한 뒤, 시간대별 대응 절차(경영진 긴급회의 → 스로틀 발동 → 보유자 통지 → 감독당국 보고 → 질서 있는 국채 매각 → 사후 점검 보고서 작성)를 체크리스트로 정리했다.
한국에 대한 시사점: 2022년 테라·루나 사태는 한국에서 시작된 스테이블코인 뱅크런의 대표 사례다. 당시 한국 금융당국은 대응 체계가 부재한 상태에서 사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문서의 유동성 게이트·스로틀 메커니즘은 알고리즘형이든 법정화폐 담보형이든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런 리스크 관리 체계를 어떻게 설계할 수 있는지 구체적 모델을 제공한다.
핵심 4: 집중도 리스크 모니터링 — 소수 대형 보유자 문제
문서는 '집중도 리스크(Concentration Risk)'를 별도 섹션으로 다루며, 소수의 대형 보유자(기관 투자자, 거래소, 고액 자산가)가 전체 공급량의 상당 부분을 보유할 때 발생하는 시스템 리스크를 경고한다.
상위 10개 보유자가 전체 미상환 물량의 40%를 초과하면 '옐로 경보'로 강화 모니터링에 들어가고, 허핀달-허쉬만 지수(HHI) 2,500 초과 시에도 경보가 발동된다. 주간 단위로 집중도를 측정하고, 대형 보유자와의 소통을 통해 환매 의향을 사전에 파악하도록 권고한다.
한국에 대한 시사점: 한국 가상자산 시장은 소수 대형 거래소에 유동성이 집중되는 구조적 특성이 있다. 향후 원화 연동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될 경우, 특정 거래소나 기관이 대량 보유하는 상황이 충분히 예상된다. 집중도 모니터링 기준과 경보 체계는 한국형 스테이블코인 규제에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할 요소다.
핵심 5: "기존 규제를 새 기술에 끼워맞추지 말라"
이 문서의 근본적 메시지는, 디지털자산에 기존 증권법이나 은행법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 환경에 맞는 감독 도구와 분류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증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하위 테스트(Howey Test)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실무적으로 작동 가능한 '바운더리 테스트'를 제안한다. 집행 조치의 투명성 강화, 혁신 장려와 투자자 보호의 균형도 핵심 주제다.
문서 작성자는 "이 프레임워크는 특정 기능이 허용되는지 금지되는지를 규정하지 않는다. 그 판단은 규제 당국의 몫이다. 우리는 감독 마찰을 줄이고 통제된 파일럿을 지원하기 위한 구현 도구를 제공할 뿐"이라고 명시했다.
한국에 대한 시사점: 한국 금융당국은 현재 자본시장법, 전자금융거래법 등 기존 법체계 내에서 디지털자산을 규율하려는 접근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스테이블코인의 결제·수익·리워드 기능이 복합적으로 결합될 경우, 기존 법률의 어느 칸에도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 문서는 "칸을 새로 만들되, 감독의 실효성은 오히려 높여라"는 접근법을 보여준다.
향후 12~24개월이 디지털 금융의 10년을 결정한다
이 문서의 프레임워크가 곧바로 SEC의 공식 규칙으로 채택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나 미국에서 스테이블코인·디지털자산 규제의 기술적 논의가 이 정도 수준까지 구체화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한국은 2024년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을 시행하며 글로벌 규제 경쟁에서 앞서 나갔지만, 2단계 입법(스테이블코인, 토큰증권, 시장 구조)에서는 아직 구체적 방향을 확정하지 못한 상태다. 미국이 '결제형 vs 수익형 vs 리워드형'이라는 분류 체계와 실시간 감사 인프라를 논의하고 있는 지금, 한국 금융당국도 단순히 "허용할 것인가, 금지할 것인가"를 넘어 "어떻게 감독할 것인가"에 대한 기술적 답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규제의 명확성은 혁신을 늦추는 것이 아니라, 기관 투자자의 참여를 앞당긴다. 향후 12~24개월간 주요국 규제 당국이 어떤 방향을 잡느냐가 디지털 금융의 다음 10년을 결정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