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결제은행(BIS)이 블록체인의 구조적 한계를 정면으로 분석한 보고서를 내놨다. 신현송 BIS 수석이코노미스트가 직접 저술한 이번 워킹페이퍼는 탈중앙화 블록체인이 화폐의 핵심 가치인 '네트워크 효과'를 스스로 갉아먹는다는 주장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스테이블코인 규제 논의가 전 세계적으로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나온 이 보고서는 업계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전망이다.
■ 화폐의 힘은 '쓰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가치 있다'는 것
먼저 보고서의 출발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화폐가 가치를 갖는 이유는 단순하다.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나도 쓰고, 내가 쓰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받아들인다. 이 선순환이 화폐의 핵심이다. 편의점에서 카드를 쓸 수 있는 건 카드를 받는 가맹점이 많기 때문이고, 가맹점이 많은 건 카드를 쓰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원화가 대한민국에서 강력한 화폐인 이유도 같다. 한국은행이 발행하고 모든 경제 주체가 동일한 화폐를 쓴다는 공통된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이를 '화폐의 단일성(Singleness of Money)'이라고 표현한다.
■ 블록체인의 역설: 탈중앙화할수록 수수료가 올라간다
블록체인은 이 중앙은행의 역할을 '검증자(Validator)'들의 분산 합의로 대체하려 했다. 그런데 여기서 구조적 문제가 발생한다.
검증자들은 왜 자기 컴퓨터를 돌리며 블록체인을 유지할까? 보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보상은 결국 이용자들이 내는 가스비(수수료)에서 나온다. 보고서의 핵심 수식은 이것이다.
필요 보상 = 검증 비용 ÷ (1 - 합의 기준치)
여기서 '합의 기준치'란 블록체인이 정상 작동하기 위해 참여해야 하는 검증자의 비율이다. 이 기준이 높을수록(더 탈중앙화될수록) 검증자에게 줘야 하는 보상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만장일치에 가까워질수록 보상은 무한대로 치솟는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동네 반상회에서 결정을 내리려면 주민 과반수만 동의하면 된다. 그런데 만약 모든 주민이 동의해야만 결정이 가능하다면? 한 명이라도 빠질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모두를 끌어들이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든다. 블록체인의 탈중앙화 비용이 바로 이런 구조다.
■ "혼잡은 버그가 아니라 설계된 기능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더리움 가스비 폭등을 '기술적 한계'로 여긴다. 그러나 보고서는 정반대의 시각을 제시한다. 혼잡이 오히려 필수 기능이라는 것이다.
수수료가 낮아지면 검증자에 대한 보상이 줄고, 보상이 줄면 검증자가 이탈하며, 검증자가 이탈하면 블록체인 보안이 무너진다. 따라서 블록체인은 구조적으로 일정 수준의 혼잡을 유지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고속도로 통행료가 도로 유지비를 충당하듯, 가스비 혼잡이 블록체인의 유지비를 충당하는 셈이다.
실제로 이더리움 가스비가 폭등했던 2021년 DeFi 붐, NFT 열풍 시기가 바로 이 원리의 현실판이었다.
■ 그래서 솔라나, 트론이 생겨났다
수수료를 감당하지 못한 이용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더 싼 체인으로 이동했다. 솔라나는 낮은 수수료와 빠른 처리 속도로 이용자를 끌어모았고, 트론은 신흥시장의 스테이블코인 송금을 장악했다. BNB 체인, 아발란체, 수이(Sui) 등 수십 개의 체인이 각자의 틈새를 차지했다.
2025년 말 기준으로 이더리움, 솔라나, 트론 각각의 연간 수수료 수익이 5억~6억 달러 수준으로 비슷해졌다는 데이터가 이를 증명한다. 단일 체인의 지배가 아닌 '파편화된 생태계'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보고서는 이것이 시장 실패가 아니라 탈중앙화 합의의 경제학이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라고 규정한다.
■ 스테이블코인의 치명적 약점: 같은 USDC가 다른 돈이다
한국의 많은 투자자들이 익숙한 USDC, USDT를 생각해보자. 이더리움 위의 USDC와 솔라나 위의 USDC는 같은 돈처럼 보이지만 사실 다른 장부에 기록된 별개의 자산이다. 두 체인 간에 직접 주고받을 수 없고, 브릿지(Bridge)라는 중간 프로토콜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이 브릿지가 문제다. 2021년부터 2024년까지 브릿지 해킹으로 인한 누적 피해액이 25억 달러를 넘어섰다. 속도도 느리고 비용도 든다. 결국 '같은 이름의 스테이블코인'이 체인마다 서로 호환되지 않는 형태로 쪼개져 유통되고 있는 셈이다.
보고서는 이것이 화폐의 핵심 가치를 정면으로 훼손한다고 지적한다. 화폐의 네트워크 효과는 '전 세계 USDC 보유자 수'가 아니라 '같은 체인 위의 USDC 보유자 수'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 레이어2도 해답이 아니다
"이더리움이 비싸면 아비트럼(Arbitrum)이나 옵티미즘(Optimism) 같은 레이어2(L2)를 쓰면 되지 않나?" 한국 DeFi 이용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나오는 반응이다.
보고서는 L2 역시 같은 문제의 반복이라고 본다. L2마다 별도의 유동성 풀과 이용자 기반이 형성되고, 아비트럼 이용자와 옵티미즘 이용자는 여전히 서로 간에 원활하게 거래할 수 없다. 파편화가 L1 수준에서 L2 수준으로 내려온 것뿐이다. 레이어를 늘린다고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한국 규제 당국이 주목해야 할 대목
보고서에서 한국 금융당국 관점에서 특히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스테이블코인 규제가 아무리 잘 설계돼도 '파편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준비자산 비율이나 환매 조건을 규제해도 블록체인의 합의 기준치(^)와 수수료 구조(ρ)는 바뀌지 않는다. 한국이 스테이블코인 발행·유통 규제 체계를 마련하더라도, 어떤 블록체인 레일 위에서 유통되느냐에 따라 사실상 다른 금융 상품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현재 국내에서 트론 기반 USDT가 해외 송금과 환전 목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이론이 아닌 현실이다.
■ "중앙은행 없는 단일 화폐 시스템은 불가능하다"
보고서의 최종 메시지는 명확하다. 탈중앙화 블록체인은 구조적으로 화폐 파편화를 만들어내며, 이 문제는 더 나은 기술로 해결할 수 없다. 전략적 불확실성은 컴퓨터 성능의 문제가 아니라 개별 경제 주체의 유인(Incentive) 구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궁극적으로 '통합 원장(Unified Ledger)' 구상, 즉 중앙은행이 닻을 내린 공통 플랫폼 위에서 토큰화된 중앙은행 화폐, 상업은행 예금, 디지털 자산이 함께 작동하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한국은행이 추진 중인 CBDC 및 토큰화 예금 연구와도 맥이 닿아 있는 방향이다.
블록체인 기술의 혁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그래머블 화폐, 자동화 결제, 투명한 원장 등의 혁신은 중앙은행이 신뢰 기반을 제공하는 통합 인프라 위에서도 구현 가능하다는 것이 보고서의 핵심 주장이다.
출처: BIS Working Papers No.1335, "Tokenomics and blockchain fragmentation" — Hyun Song Shin (2026.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