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전 일본 도쿄 미나토구의 더 프린스 파크타워 도쿄. 행사 시작 전부터 메인 행사장 좌석은 세계 각국에서 모인 디지털자산 업계 관계자와 금융기관 임직원, 투자자, 개발자들로 빠르게 채워졌다.
오전 10시 정각, 무대 중앙에 설치된 거대한 ‘X’ 로고 위로 WebX 2026의 개막을 알리는 화면이 올라왔다. 올해로 네 번째를 맞은 아시아 최대 규모의 Web3 콘퍼런스가 막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개막식의 순서는 짧았지만 메시지는 분명했다.
아오키 마코토 WebX 실행위원장의 개회사에 이어 하기우다 고이치 자민당 간사장 대행이 무대에 올랐다. 이어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영상 축사를 전했고,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산업상이 기조연설에 나섰다. 행사 주최 측과 집권당, 총리실, 산업정책을 담당하는 경제산업성이 30분 안에 차례로 무대를 채운 것이다.
이날 개막식은 WebX 2026이 단순한 디지털자산 업계 행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일본 정부가 Web3를 일부 투자자의 자산이나 특정 기술기업의 사업 영역이 아니라 금융과 산업, 콘텐츠, 인공지능을 연결하는 국가 경쟁력의 문제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나는 아날로그형 정치인”…그러나 일본은 시험하기로 했다
하기우다 의원은 개회사에서 자신을 “아날로그형 정치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경제산업상 재임 당시 젊은 세대와 관련 업계 관계자들로부터 새로운 기술과 산업에 관한 제안을 받았던 경험을 언급하며, 일본에서도 이를 한번 시도해보자는 판단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현장 화면에 표시된 자막에서도 ‘아날로그형 정치인’이라는 표현과 함께, 젊은 세대의 제안을 받고 일본이 새로운 기술을 시험해보기로 했다는 취지의 발언이 이어졌다.
이 발언은 일본의 Web3 정책이 처음부터 완성된 청사진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일본은 디지털자산 거래소 해킹과 투자자 피해를 겪은 뒤 세계에서도 가장 엄격한 규제 체계를 구축한 국가 중 하나였다. 높은 세금과 복잡한 규제로 인해 일본의 Web3 스타트업과 개발자들이 해외로 빠져나간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문제를 규제 완화와 규제 강화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만 접근하지 않았다. 투자자 보호를 강화하면서도 기업과 개발자가 일본 안에서 사업을 계속할 수 있는 제도적 통로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하기우다 의원의 발언에서 중요한 단어는 ‘완성’이 아니라 ‘시도’였다. 모든 위험이 사라진 뒤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관리할 규칙을 만들면서 시장을 열겠다는 접근이다.
총리의 5분이 던진 메시지
이어 대형 화면에 다카이치 총리의 모습이 등장했다. 총리실을 배경으로 일본 국기 옆에 앉은 다카이치 총리는 영상 축사를 통해 WebX 2026의 개막을 축하했다.
영상은 약 5분간 이어졌다. 발언의 길이보다 더 주목할 대목은 현직 일본 총리가 민간 디지털자산 콘퍼런스의 개막 순서에 직접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이다.
총리가 등장하는 순간 WebX는 업계 관계자들만의 행사를 넘어 일본 정부가 글로벌 시장에 정책 방향을 알리는 외교·산업 무대가 됐다.
같은 날 행사에는 경제산업상뿐 아니라 디지털대신과 재무대신도 연사로 예정됐다. 일본의 디지털자산 정책을 기술 부처나 금융 당국 한 곳에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총리실, 집권당, 경제산업성, 디지털 부처, 재무·금융 당국이 각자의 관점에서 논의하는 구조다.
Web3 산업에서 정치인의 축사는 흔하다. 그러나 총리와 여러 부처 장관, 집권당 정책 책임자들이 한 행사에 연속으로 참여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는 일본 정부가 디지털자산을 ‘허용할 것인가’의 단계에서 ‘어떤 산업으로 만들 것인가’의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디지털자산을 ‘규제 대상’에서 ‘산업 인프라’로
아카자와 경제산업상은 총리 영상 축사 직후 무대에 올라 기조연설을 진행했다.
경제산업성은 일본의 산업정책과 기업 경쟁력, 기술 혁신을 담당하는 부처다. 금융 규제기관의 책임자가 아니라 산업정책의 책임자가 Web3 콘퍼런스 개막 기조연설에 나섰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디지털자산을 투자자 보호와 자금세탁 방지의 관점에서만 다루지 않고, 차세대 산업과 금융 인프라의 관점에서 바라보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번 행사의 전체 의제에서도 이 같은 변화가 드러난다.
비트코인 가격이나 디지털자산 거래소에 국한된 세션보다 일본 3대 금융그룹의 블록체인 전략, 엔화 스테이블코인, 토큰화 예금, 토큰화 증권, 국채와 회사채의 온체인화, 기관투자자의 디지털자산 진입, 인공지능 에이전트 결제, 사이버보안과 같은 주제들이 전면에 배치됐다.
미즈호, 미쓰비시UFJ, 미쓰이스미토모 등 일본 주요 금융그룹 관계자들은 블록체인이 글로벌 금융과 결제 인프라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논의한다. JP모건의 블록체인 사업 부문 Kinexys와 Coinbase Institutional, BlackRock Japan, Fidelity, SBI, Ondo Finance, Pantera Capital 등도 연사로 참여한다. 공식 일정에는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 증권, 온체인 금융, 디지털자산 ETF, AI 에이전트 경제를 다루는 세션들이 촘촘하게 배치됐다.
이제 Web3 행사의 주인공은 블록체인 프로젝트만이 아니다. 은행과 자산운용사, 카드·결제회사, 정부, 글로벌 자본시장이 무대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Web3가 금융의 바깥에서 기존 질서를 흔드는 기술에서 금융 시스템 내부로 들어가 결제와 자산관리, 자본시장을 다시 설계하는 기술로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일본은 ‘금융상품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추진한다
일본 금융청은 최근 디지털자산 규제의 법적 기반을 자금결제법에서 금융상품거래법 체계로 옮기는 방안을 제시했다.
금융청 산하 금융심의회 작업반은 디지털자산을 증권과는 구별되는 금융상품으로 분류하고, 발행자와 거래사업자의 정보 공시를 강화하는 한편 내부자거래 규제와 시장감시 체계를 도입할 것을 권고했다.
디지털자산 사업자에 대해서는 제1종 금융상품거래업자에 준하는 규율을 적용하고, 은행과 보험회사 계열사가 일정한 위험관리 체계 아래 디지털자산 사업을 취급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도 제안됐다.
이는 단순한 규제 완화가 아니다.
디지털자산을 금융시장 바깥의 예외적인 상품으로 방치하지 않고 기존 자본시장 수준의 공시와 감시, 책임을 부과하는 대신 제도권 금융기관의 참여 경로를 열겠다는 것이다.
일본의 전략은 분명하다. 디지털자산을 규제하지 않는 시장을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규제할 수 있기 때문에 금융기관이 들어올 수 있는 시장을 만들겠다는 접근이다.
WebX 2026의 개막식에서 정치권과 산업 부처가 앞에 서고, 이후 금융기관과 글로벌 기술기업이 무대를 이어받는 구성은 이 같은 정책 방향을 그대로 압축해 보여줬다.
화려한 연사보다 중요한 것은 ‘한 무대’
올해 WebX에는 230명이 넘는 연사가 참석한다.
다카이치 총리와 일본 정부 주요 인사를 비롯해 Uniswap 창업자 헤이든 애덤스, Bitmine 이사회 의장 톰 리, Canton Network 공동창업자 유발 루즈, Coinbase, JP모건 Kinexys, Pantera Capital, Ondo Finance, SBI, MUFG, 미즈호, 미쓰이스미토모 관계자들이 무대에 오른다.
지난해 행사에는 99개국 2639개 기업에서 1만4115명이 참석했고, 165개 스폰서와 270명의 연사가 참여했다.
그러나 이번 행사에서 한국이 주목해야 할 것은 연사의 숫자나 해외 유명 인사의 이름만이 아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정치인과 관료, 전통 금융기관, 글로벌 디지털자산 기업, 개발자와 미디어가 하나의 무대에서 같은 산업의 미래를 논의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도 스테이블코인과 토큰증권, 법인의 디지털자산 시장 참여, 디지털자산 ETF, 은행의 블록체인 활용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다. 기술력과 거래시장 규모, 이용자의 관심도 역시 일본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논의의 공간은 여전히 분리돼 있다.
정책 토론회에서는 규제가, 금융 행사에서는 은행의 이해관계가, 블록체인 행사에서는 기술과 토큰 가격이 각각 이야기된다. 부처와 국회, 은행, 기술기업이 하나의 산업 지도를 놓고 순서를 정하는 장면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한국 국회에는 디지털자산 발행과 유통, 스테이블코인, 사업자 인가 체계 등을 다루는 복수의 기본법안이 발의돼 있다. 그러나 정부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의 주주 구성과 2단계 입법의 세부 내용 등 핵심 쟁점에 대해 아직 확정된 바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한국에 법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부족한 것은 각각의 법안과 정책을 어떤 순서로 연결해 하나의 산업으로 만들 것인지에 대한 공통의 시간표다.
일본을 부러워하기보다 구조를 봐야 한다
물론 일본의 접근이 모두 성공했다고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일본은 의사결정이 느리고 규제가 복잡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정부 행사에 고위 인사가 참여했다고 해서 세금 문제와 인허가, 유동성 부족, 스타트업의 해외 이전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WebX 무대에서 발표된 비전이 실제 법률과 상품, 이용자 서비스로 연결되는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일본의 강점은 방향을 정한 뒤 정부와 대기업, 금융기관이 함께 움직일 수 있는 구조에 있다. 느리게 출발하더라도 한 번 산업의 방향이 정해지면 은행과 증권사, 대기업, 지방정부가 동시에 실행에 들어갈 수 있다.
이날 행사장에서는 이미 그 움직임이 보였다.
스테이블코인은 더 이상 거래소 사이에서 자금을 옮기는 수단으로만 논의되지 않았다. 기업의 결제와 해외 송금, 재무관리 수단으로 다뤄졌다. 토큰화는 실험적인 자산 발행이 아니라 국채와 회사채, 예금, 펀드, 실물자산을 연결하는 자본시장 인프라로 제시됐다.
AI 역시 별도의 산업이 아니었다. 스스로 거래하고 결제하는 AI 에이전트가 등장할 때 어떤 지갑과 신원, 결제수단, 규칙이 필요한지를 Web3와 함께 논의하는 방식이었다.
결국 Web3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금융과 산업 안으로 들어가 이름을 바꾸고 있었다.
한국이 답해야 할 질문
WebX 2026 개막식이 한국에 던진 질문은 “일본이 우리보다 앞섰는가”가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한국이 디지털자산을 투자시장으로만 남겨둘 것인지, 아니면 결제와 자본시장, 콘텐츠, 인공지능을 연결하는 산업 인프라로 설계할 것인지다.
이를 위해서는 스테이블코인, 토큰증권, 법인 참여, 수탁, ETF, 과세를 각각 따로 논의해서는 안 된다. 어떤 제도를 먼저 열고, 어떤 위험관리 장치를 붙이며, 은행과 핀테크, 기술기업이 각각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지 하나의 로드맵 안에서 정리해야 한다.
일본은 이날 총리의 영상 축사와 경제산업상의 기조연설로 그 방향을 세계에 보여줬다.
말보다 실행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일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국가의 최고 의사결정권자와 산업정책 책임자가 Web3 행사 첫 무대에 등장한 장면은 가볍지 않았다.
13일 도쿄에서 열린 WebX 2026은 디지털자산이 더 이상 변방의 실험이 아니라는 선언으로 시작됐다.
한국이 고민해야 할 것은 이 흐름을 막을 방법이 아니다. 누가, 어떤 규칙으로, 얼마나 빨리 이 흐름을 산업으로 연결할 것인가다.
디지털자산 경쟁의 승부는 기술을 먼저 발견한 나라가 아니라, 기술과 금융과 정책을 먼저 연결한 나라가 가져갈 가능성이 크다.
토큰포스트는 13일부터 이틀간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WebX 2026 현장에서 주요 정책·금융·디지털자산 세션을 취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