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성민 칼럼] AI의 최대 수혜자가 블록체인일 수 있는 이유
효율이 높아질수록 수요가 늘어난다는 ‘제번스의 역설’… AI가 가짜를 쏟아낼수록 진짜를 증명하는 기술의 가치가 커진다
인공지능(AI)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까지 정교하게 흉내 낸다. 누구나 전문가 수준의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역설이 생긴다. 무엇이든 쉽게 만들 수 있게 될수록, 무엇이 진짜인지를 구별하는 일은 오히려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믿을 만한 정보는 부족해진다. 콘텐츠를 만드는 비용은 내려가는데, 그 진위를 확인하는 비용은 올라간다.
AI가 모든 것을 흔하게 만드는 시대에 가장 귀해지는 것은 어쩌면 '진짜'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진짜를 증명하는 기술로 블록체인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160년 전 영국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1865년 영국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는 당시의 상식과 반대되는 주장을 내놓았다. 증기기관의 성능이 좋아지면 같은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석탄이 줄어들 테니 전체 석탄 소비도 감소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제번스는 달리 봤다. 석탄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증기기관을 활용하는 산업이 늘어나고, 결국 석탄 소비는 오히려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효율이 높아지면 소비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수요가 생겨난다. 이것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제번스의 역설'이다.
이 원리는 기술의 역사에서 여러 차례 반복됐다. 컴퓨터의 연산 비용이 떨어지자 컴퓨터를 덜 쓰게 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곳에서 활용하게 됐다. 클라우드가 보급되면서 기업들은 과거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를 저장하고 처리하기 시작했다.
2025년 중국 딥시크가 저비용 고성능 AI 모델을 공개했을 때도 비슷한 논쟁이 벌어졌다. AI 개발 비용이 낮아지면 고가의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수요가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최고경영자는 제번스의 역설을 거론했다. AI가 저렴하고 편리해질수록 사람들이 AI를 훨씬 더 많이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벌어지는 일이 바로 그렇다.
AI가 글 한 편을 작성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몇 초에 불과하다. 기업은 광고 영상 수십 편을 만들 수 있고, 개인은 전문 디자이너 없이도 이미지를 제작한다. 과거에는 상당한 비용과 인력이 필요했던 일들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로 바뀌고 있다.
생산 비용이 내려가자 생산량이 폭발하고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AI가 만든 콘텐츠가 넘쳐날수록 사람들은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된다. 누가 만들었는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중간에 조작되지는 않았는가. 그리고 누가 책임지는가.
여기에서 새로운 시장이 열린다. 콘텐츠 생산이 쉬워질수록 출처와 진위를 확인하려는 수요도 커지는 것이다.
블록체인의 역할을 생각해볼 대목이다.
블록체인은 여러 참여자가 거래와 기록을 공유하고, 이미 기록된 내용을 임의로 바꾸기 어렵게 만드는 기술이다. 비트코인은 이 원리를 이용해 디지털 세계에서 같은 돈을 두 번 사용하는 문제를 해결했다. 중앙의 은행 없이도 누가 어떤 비트코인을 보유하고 있는지 공동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돈뿐 아니라 정보의 기록에도 활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진 한 장이 있다고 하자. 언제 촬영했는지, 누가 최초로 등록했는지, 이후 어떤 수정이 이뤄졌는지를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누군가 사진을 조작하거나 다른 사람의 작품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때 확인할 근거가 생긴다.
이미 글로벌 기술 기업들은 디지털 콘텐츠의 출처를 확인하는 C2PA 같은 표준을 개발하고 있다. 이 기술 자체에 블록체인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여러 기업과 기관이 공동으로 기록을 보존하고 검증해야 하는 경우, 블록체인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다.
AI 시대에는 이런 기반 기술의 중요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사람을 증명하는 문제는 더욱 절박하다.
과거 인터넷에서 우리는 상대방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AI는 이제 사람처럼 대화하고, 얼굴을 만들어내고, 목소리까지 복제한다. 앞으로 온라인에서 만나는 상대가 실제 사람인지, AI가 만든 가상 인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 더 많아질 것이다.
오픈AI의 샘 올트먼이 공동 창업한 '월드(World)'가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프로젝트는 개인정보를 불필요하게 공개하지 않으면서 온라인에서 자신이 실제 사람임을 증명하는 체계를 구축하려 한다. 블록체인 역시 이 구상의 일부다.
AI 개발을 이끄는 인물이 AI 시대의 인간 인증 문제를 해결하는 데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블록체인의 기회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변화는 돈의 이동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 인터넷의 경제활동은 사람이 중심이었다. 사람이 상품을 고르고, 결제 버튼을 누르고, 은행이나 카드회사가 거래를 처리했다.
하지만 AI 에이전트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AI가 사람을 대신해 정보를 검색하고, 필요한 서비스를 구매하고, 다른 AI의 도움을 받아 업무를 처리한다.
가령 AI가 유료 데이터를 조회할 때마다 몇 원을 지불하고, 다른 AI가 제공하는 분석 서비스를 이용할 때마다 이용료를 자동 정산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런 거래가 하루에도 수백만, 수천만 번 발생할 수 있다.
사람이 일일이 승인하거나 기존 카드 결제 절차를 거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적은 금액을 빠르고 자동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결제 수단이 필요해진다.
스테이블코인과 블록체인 결제망이 주목받는 이유다.
이미 코인베이스와 클라우드플레어 등은 인터넷 서비스와 AI 에이전트가 자동으로 결제할 수 있도록 하는 'x402' 기술을 추진하고 있다. 사람이 결제하는 인터넷에서 기계도 거래하는 인터넷으로의 전환을 준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제번스의 역설을 떠올릴 수 있다. 거래 비용이 낮아지면 지금까지 경제성이 없었던 작은 거래들이 가능해진다. 거래 한 건에서 남는 돈은 적더라도 거래량이 폭발하면 전혀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질 수 있다.
한국에서 논의 중인 원화 스테이블코인 역시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원화와 연동된 새로운 코인을 발행하는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AI가 참여하는 디지털 경제에서 원화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블록체인이 기록을 바꾸기 어렵게 만든다고 해서 그 기록이 모두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거짓 정보를 장부에 올리면, 바꾸기 어려운 거짓 기록이 남을 뿐이다.
콘텐츠의 진위를 확인하려면 최초 기록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하고, 사람의 신원을 증명하려면 개인정보 보호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모든 정보를 블록체인에 올릴 필요도 없다. 기존 데이터베이스나 디지털 서명만으로 충분한 분야도 많다.
AI와 블록체인을 결합했다는 이유만으로 사업의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비용을 낮추고, 기존 기술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풀어내는 기업과 프로젝트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언론 역시 이 변화에서 예외가 아니다.
AI가 뉴스를 작성하고 요약하는 시대에 단순히 정보를 빠르게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누구나 비슷한 기사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중요한 것은 누가 직접 취재했는지, 누가 사실을 검증했는지, 누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보도의 책임을 지는가 하는 문제다. AI가 기사를 대신 쓸 수는 있어도 언론의 신뢰까지 대신 만들어줄 수는 없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이 해야 할 일의 가치가 새롭게 드러나는 것이다.
지금 시장의 관심은 AI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거대언어모델에 집중돼 있다. 당연한 일이다. AI 혁명의 첫 번째 수혜자는 AI를 만들고 운영하는 기업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AI가 사회 곳곳으로 확산한 뒤에는 다른 산업이 주목받을 수 있다. AI가 만들어낸 수많은 정보의 출처를 확인하고, 사람과 기계를 구별하며, AI끼리 이뤄지는 거래를 안전하게 처리하는 산업이다.
그 기반 기술 가운데 하나가 블록체인이다.
제번스가 160년 전 발견한 것은 단순히 효율이 높아지면 소비가 증가할 수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기술의 발전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AI는 콘텐츠와 지능의 생산 비용을 낮추고 있다. 그 결과 세상에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정보와 서비스가 쏟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신뢰를 확인하고 거래를 보증해야 할 필요성도 커질 것이다.
AI가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정보다. 그러나 그 풍요 속에서 더욱 귀해지는 것은 신뢰다.
AI 혁명의 최대 수혜자가 반드시 AI를 만드는 기업일 필요는 없다. AI가 만들어낼 새로운 세상에서 무엇을 믿을 수 있는지 증명하는 기술이 더 큰 기회를 맞을 수도 있다.
블록체인의 진정한 가치는 코인 가격이 아니라, 바로 그 역할을 얼마나 제대로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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